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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8월의 詩: 수박씨 호박씨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즛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니빨로 밝는다

 

수박씨 호박씨를 입에 넣는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人情이 깃들인 것이다

태산泰山의 구름도 황하黃河의 물도 예님군의 땅과 나무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뵈이는 것이다

 

이 적고 가부엽고 갤족한 희고 까만 씨가

조용하니 또 도고하니 손에서 입으로 입에서 손으로 오르나리는 때

벌에 우는 새소리도 듣고 싶고 거문고도 한 곡조 뜯고 싶고 한 五千오천 말 남기고 함곡관函谷關도 넘어가고 싶고

기쁨이 마음에 뜨는 때는 희고 까만 씨를 앞니로 까서 잔나비가 되고

근심이 마음에 앉는 때는 희고 까만 씨를 혀끝에 물어 까막까치가 되고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서는

오두미五斗米를 버리고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온 사람도

그 차개에 수박씨 닦은 것은 호박씨 닦은 것은 있었을 것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벼개하고 누었든 사람도

그 머리맡에 수박씨 닦은 것은 호박씩 닦은 것은 있었을 것이다

 

 

「수박씨 호박씨」 
  백석 <인문평론 9호>, 1940년 6월 

 

 

 


 

 

어진 나라에서 어진 사람들이 살고 오랜 인정과 지혜와 세월이 여기 깃들어 있다. 오늘의 근심은 어제의 일일 것이니 나는 볕 좋은 마당에서 수박씨 호박씨를 까며 세월을 닦는다. 바람이 불면 시원해서 좋을 것이고 비가 오면 똑똑 처마에 흘러내리는 낙숫물 소리가 아름다워서 좋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그 머언 거리만큼 삶이 투명해질 때까지 실눈을 뜨고 그 깊이를 짐작해본다. 고통이 있어 또 다른 평안을 꿈꾸고 슬픔이 있어 안위의 날을 기다리니, 주름진 옷을 다리며 구김없는 삶을  고대한다.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되어, 하릴없이 흘러간 듯한 하루의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흔적없이 사라져버린 듯한 허무에 휩사일 때, 그것은 삶의 의미가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는 헛된 집착 때문일 것이리라. 그리고는 자연에 순응하며 물과 바람처럼 한없는 삶의 틈으로도 스며들 수 있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 하나 오늘에 남아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Gustav Mahler - Symphony No. 5: IV. Adagietto by Gustavo Dudamel with LA Philharmo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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