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문재

1월의 詩: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詩集『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오늘은 어제의 내일, 그리고 나는 지금 노을이 지는 여기, 오늘에 있다. 오늘은 오늘이고 또 내일이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아니며 또한 나이기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허공에 올려놓는다. 그 고요한 순간, 찰나의 진공. 진공 속.. 더보기
어떤 경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생일주간 얼굴 없는 아버지에게 모우터싸이클을 타고 가을의 환한 햇빛 속을 달려나갈 때 나는 녹슬어버렸다 그건 당신의 이마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것인데 당신은 얼굴이 없으므로 그 돌은 명중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생일에 창문마다 불빛 하나씩 내다 건 거리의 끝에서 자욱한 새벽 안개 속에서 내가 당신의 어두운 윤곽으로 거리를 나올 때 당신은 나에게 무어라 잔등 두드리겠는가 나의 물그릇은 아침에 버리는 물 속에 함께 내버려져 저녁 가을 강이 붉게 녹스는 것을 도와 주고 바다가 소금을 결정할 때 손쉽게 모여 소금이 될 것이다 한낮 가득한 돌들이 무거워지는 낯익은 소리들 자욱한 소리들 모우터싸이클을 타고 햇빛의 밖에서 저녁으로 달려올 때 당신은 아직 얼굴 없는 산이다 불타는 가을 산이다 「생일주간」 이문재 詩集『내 젖은 구.. 더보기
낙타의 꿈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 「낙타의 꿈」 中에서 이문재 詩集『내 젖은 구두 벚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 中에서 ***********************************************************************************.. 더보기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사막」 이문재『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속도와 스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어쩌랴. 새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상대성과 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속으로 사는 삶이 따로 있을까마는 제아무리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속을 유지해도 나의 정속은 시시각각 속도들의 좌표상에 놓인다. 경쟁이 발전의 초석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또 그와 같은 외설적인 구호가 근대의 숙명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서 감당할 만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속도전의 트라우마는 아랑.. 더보기
봄, 몸 거기에도 햇볕의 힘 가닿는구나 어지럼증 한바퀴 내 몸을 돌아나간다 기억이 맑은 에너지일 수 있을까 식은 숭늉같은 봄날이 간다 이 질병의 언저리에 궁핍한 한세월, 봄빛의 맨 아래에 깔린다 죽음이 이렇게 부드러워지다니 이 기억도 곧 벅차질 터인데 햇빛은 지금 어느 무덤에 술을 불어넣으며 할미꽃 대궁 밀어올리는가 그 무덤들 보이지 않지만 문 밖까지 굴러와 있는 것 같아서 살아 있음은, 이렇게 죽음에게 허약하구나 아픔으로 둥글어지는 젖은 몸, 그리고 조금씩 남은 봄, 자글자글 햇빛이 탄다 「봄, 몸」 이문재 詩集『산책시편』(민음사, 1993) 봄날, 따뜻하고 환한 햇살의 여운이 길게 밤까지 이어집니다. 포근한 봄밤...이 봄도 또 한 세월로 가고 바람따라 흘러가는 것들에 줄을 서겠죠. 생명에서 죽음으로, 햇볕들.. 더보기
기념식수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 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우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