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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나무

오늘의 그대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나 기다리고 있었는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기쁨이여」 허수경 詩集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 2005) 中에서 슬픈 기쁨, 허수경의 슬픔은 거대한 이 세계의 질서에서 소박한 내면을 통해 정.. 더보기
좋은 밤 밤이 올 때까지 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책장을 덮으면 밤은 이미 문지방 너머에 도착해 있다 얼마나 많은 동굴을 섭렵해야 저토록 검고 거대한 눈이 생기는가 매번 다른 사투리로 맞이하는 밤 밤은 날마다 고향이 달랐다 밤이 왔다 밤의 시계는 매초마다 문 잠그는 소리를 낸다 나를 끌고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 낮의 일을 떠올린다 노인은 물속에 묻히고 싶다며 자전거를 끌고 연꽃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은 살 수 있었다고 최고의 악동은 살아남는다고 지구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반드시 만날 거라고 밤의 배 속에서 돌들이 식는다 나의 차가운 혀도 뜨거운 무언가(無言歌)를 삼키리라 낮엔 젊었고 밤엔 늙었다 낮에 노인을 만났고 밤에 그 노인이 됐다 밤은 날마다 좋은 밤이었다 「좋은 밤」 심보선.. 더보기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 더보기
어제와 나와 밤의 이야기 우산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그게 나는 아니다모자를 쓴 사람이 있다그건 나였을 수도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뿌리가 깊어서꺽이지 않는 나무구나비는 오늘만 오는 거이 아니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불투명한 얼굴내일 또 공원에 갈 것이다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잠깐씩 어제를 생각할 것이다어제는 구름같고, 쟁반같고, 빙하같고, 비탈 같고, 녹고 있는 소금같다. 햇빛에 투명해지는 초록같고, 안부를 묻는 부케같고, 부은 손 같다. 상한 빵 같고, 어랜 개의 솜털 같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다.어제가 좋았는지 나빴는지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공원 앞 찻집에 앉으면또 생각하게 된다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다어제는 어제를 버릴 수가 없었다가방에 담긴 것이 무언인지 알 수 없게묶어 둔 사람은 잊.. 더보기
고양이 오래된 꽃병과 꽃병목에 방울...사랑의 응시, 야옹, 털실의 몽상가현기증의 속도와 다시 털실 바구니...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그토록 짧은 혀...송찬호의「고양이」(『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2009)에 대한 짧은 요약,고양이, 고양이, 스며라 배암!허우통(Houtong, 侯硐후동) 고양이 마을 @ Taiwan on last July ● 고양이와 산다는 건 멋진 일이야 by 316 더보기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그 슬픔은 과로를 하면서까지(!), 나를 일으키고, 돌봐주며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나는 슬픔이다. 슬픔이 나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슬픔이 희망과 즐거움과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안다.슬픔이 함께 하는 동안 저 심연의 낭하까지 잠수하기도 하고 때론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슬픔이 희망을 부르고 다음의 나를 위해 기억할 만한 상처를 남겨주고, 그 상처들이 나이테처럼 둥글게 둥글게 나를 단단히 감싸 안는다, 그렇게 잠시 건너와 사라지는 순환, 그리고 희망은 슬픔과 결국 같은 곳을 보는 그 동안... ...황인숙「슬픔이 나를 깨운다」(詩集『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1990)... ● A Love Idea by Mark Knopfler f.. 더보기
물오리 너에게 오리부리를 주겠다, 너에게 오리발을 주겠다, 노래를 하지 못하게, 뛰어가지 못하게...대신 너에게 부레를 주겠다. 둥실둥실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비록 다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하겠지만, 너에게 그런 永遠을 주마... ...김명민「물오리」(詩集『바닷가의 장례』문학과지성,1997)에 대한 단상... ● To Build A Home by Cinematic Orchestra 더보기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류시화의 시,「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詩集『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1991)그가 안재찬이었을때, 그는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났고, 나는 여기에 남아있었다. 바람이 남기고 간 꿈을 쓰다듬으며 나에게 남은 고요한 자리, 거기 그 언저리에... ● 처음엔 사랑이란게 by 버스커버스커 더보기
빈 의자 길쭉한 목을 늘어뜨리고 해바라기가 서 있는 아침이었다 그 곁 누가 갖다놓은 침묵인가 나무 의자가 앉아 있다 해바라기 얼굴에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박혀 있다 태양의 궤적을 좇던 해바라기의 눈빛이 제 뿌리 쪽을 향해 있다 나무 의자엔 길고 검은 적막이 이슬처럼 축축하다 공중에 얼비치는 야윈 빛의 얼굴 누구인가?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쓸어내린다 가을이었다 맨 처음 만난 가을이었다 함께 살자 했다 「빈 의자」 문태준 詩集『가재미』(문학과지성,2006) ****************************************************************************************** 가을엔 해바라기를 갖고 싶다, 어느 빈 하늘에 걸려있는 태양이라도 따다 볕바른 양지를 만들어 .. 더보기
가을 편지 예기치 않은 날자정의 푸른 숲에서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트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가을 편지」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 더보기
경험을 찾는 사람이 물방울에 길을 묻는다 '이 작은 물방울, 대기의 布施포시, 사람들이 지켜보는 무한한 푸른 공간으로부터 나오는 - (어디에, 어디에 천사들은 있는 것일까?) 문에서 나는 바람과, 투스카로라人, 구름, 찻잔, 땀 흘리는 승리자와 썩어가는 죽은 새로부터 나오는 - 이 작은 물방울은 멀리 여행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이제 우리 부엌 벽의 크림색 페인트에 달라붙어 있다. 나이 든 눈이여! 최초의 지구 중심의 보석이 어둠과 巨獸거수의 몸뚱이, 목재 위에 순간적인 섬광을 내며 번쩍이고, 인간의 손이 그를 똑바로 끌어 올리는 것을 보았던 심장-머리-신경이 연결된느 수정체들도 없이 이것은 여전히 투명하고 둥글게 매달려 있다. '높은 대성당 속에 들어 있는 뇌와 두더지의 귀, 냉동된 물고기, 호랑이 동맥같은 도살장, 개 창자같은 빈민굴에서의 .. 더보기
5월에 꽃은 높은 데서 부서진다 그 위에 떠도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새, 혹은 저 홀로 일어났다 스러져버리는 바람뿐. 별은 더 높이 반짝거리다가 소멸한다. 빈 들녘 낮은 곳에서의 잠든 평화. 암반처럼 엎드려 누운 不感의 아늑함. 그런데 부실하게 너풀대는 나비가, 건성 부는 바람이 그대를 깨워서 꽃대궁 위로 숨가쁘게 끌어올린다. - 그녀의 영혼이 모든 핏줄과 땀구멍을 통해 뛰쳐나와 자신을 그에게 보이려 하는 것은 느꼈다.* 안 돼! 가위눌려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때 꽃은 절정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5월에」 신중신 詩集『카프카의 집』(문학과지성,1998) 中에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