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olpoem

8월의 詩: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어떤 날은 노을이 밤새도록 계단을 오르내리죠 그 노을에 스친 술잔은 빛나기 시작하죠 그뿐이죠 그저 그뿐인 것에 시선이 가죠 술을 삼키거나 회를 삼킬 때마다 떴다가 지는 노을이에요 그의 목에 있는 노을을 건드리고 싶지만 내가 사는 곳은 동쪽이라 손댈 수 없죠 술을 마시고 마셔도 내 목에는 노을 지지 않죠 시간만 가죠 밤이 뛰어오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죠 노을 가까이에 다가갈 방법을 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 것도 알죠 그는 노을과 함께 곧 이 섬을 떠나죠 그뿐이고 그러니 오늘뿐이고 모든 것들은 원래 다 그렇죠 봄날의 꽃처럼 한철 잠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올해는 오늘까지만 아름답다, 이렇게요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햇살이 그대의 목.. 더보기
이 여름, 詩 둘 이 밤의 작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노년의 마지막은 불타오르고 포효해야 하기에, 꺼져가는 불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현명한 이들은 그들의 마지막이 어둠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의 말은 불꽃 하나 일으킬 수 없었기에 이 밤의 작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선한 자들은 마지막 파도 곁에서 자신들의 덧없는 행동들이 푸른 바다에서 얼마나 빛나게 춤추었을지를 슬퍼하기에, 꺼져가는 불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하세요. 한낮의 태양을 붙잡고 노래하며 시간을 허비하던 이들은 결국 그 태양이 저물어가는 것을 늦게 깨닫고 슬퍼했기에, 이 밤의 작별을 쉽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위독한 자들은 죽음을 앞두고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멀어버린 눈이 유성처럼 불타고 빛날 수 있기에 꺼져가는 불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 더보기
7월의 詩: 무늬 ​​ ​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 가진 목숨들을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 더보기
그곳에 다녀왔다 - 블랙 힐스, 사우스 다코타 (1) 세상이 완벽했던 시절 - 당신에게 비치는 아침 햇살 세상이 완벽했던 시절 우리는 그 세상에서 행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불만은 지상의 마음에 작은 울림을 만들기 시작했고 의심은 날카롭게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의심이 마음의 고리들을 파멸시켰을 때, 온갖 사악한 생각들이 뛰어들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파괴했다 영감을 위해, 삶을 위해— 질투의 표식, 두려움, 탐욕, 질투, 증오의 표식들, 빛을 꺼라. 어느 누구도 손에 표식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시작한 곳, 우리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공생하는지 잊은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살 곳이 없었다. 넘어진 사람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불쌍히 여기고 담요.. 더보기
그곳에 다녀왔다 - 블랙 힐스, 사우스 다코타 (프롤로그) 결 나무는 나무라서 나무다 나무라서 나무는 나무가 된다 나무라는 나무는 모든 나무의 나무다 나무는 나무라서 나무이며 그래서 나무의 나무는 나의 나무다. 나무는 나무가 되기 위해 담아둔 시간들을 모아 결을 만든다. 사람도 그러하다. 오랜 시간동안의 기쁨과 고통과 슬픔과 분노의 모든 감정들이 쌓여 마음의 결이 된다. 여행은 그런 마음의 결에 햇볕은 주고 바람을 주는 일이다. 너무 단단해진 그 결에 다시 빛을 주고 숨을 쉬게 해주는 일, 그래서 나는 여행을 간다. 길 바람의 길, 나는 너의 길을 세워주고 싶었다. 네가 스스로 허물어뜨린 그 시간이 푸른 빛으로 불타오르고 있을 때 나는 조용한 화형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너를 기억하기로 했다. 그 푸른 기억이 슬픈 그림자처럼 나를 배회하지 않고 그저 단단한 시간으로.. 더보기
그곳에 다녀왔다 - Carlsbad Caverns National Park Carlsbad Caverns National Park (칼스배드 동굴 국립공원)은 치와와 사막에 속하는 과다루페산맥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미국 뉴멕시코주 남쪽 텍사스 주의 경계 바로 위에 있다. Guadalupe Mountains National Park (과달루페 국립공원)과는 같은 사맥지대로 연결되어 있으며 70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국립공원은 1901년 카우보이 소년 Jim L. White가 발견하여 1915년 대중에게 알려졌고 1923년 National Monument(국가기념물)로, 1930년엔 National Park(국립공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약 300개의 동굴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116개의 동굴이 공원 안에 있다고 한다. Big Room(빅 룸)이.. 더보기
6월의 詩: 역광의 세계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큰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있는 밤이었다 「역광의 세계」 안희연 詩集『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 *다니엘 포르 나는 내가 원하기만 .. 더보기
그곳에 다녀왔다 - 종묘 종묘 정문에 들어서면 삼도(三道)라 불리는 세 줄로 나뉘어진 돌길을 볼 수 있다. 정문에서 바라봤을 때 가운데 높은 길은 조상신이 다니는 신로(神路)라 하고, 신로 동쪽(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이며, 신로 서쪽(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이다. 일반 신하와 제사를 돕는 사람들은 삼도 옆으로 걸어 다녔다. 사람의 길과 神의 길은 다르다. 그것은 저 돌길의 좁은 경계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깊고 겸허한 질문의 의미일 것이다. 더보기
5월의 詩: 五月의 사랑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네 사는 마을 저 떠도는 흰구름들과 앞산을 깨우는 신록들의 연한 빛과 밝은 빛 하나로 넘쳐흐르는 강물을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푸른 새매 한 마리가 하늘 속을 곤두박질하며 지우는 이 소리 없는 선들을, 환한 대낮의 정적 속에 물밀듯 터져오는 이 화냥기 같은 사랑을 그러한 날 누이야, 수틀 속에 헛발을 디뎌 치맛말을 풀어 흘린 춘향이의 열두 시름 간장이 우리네 산에 들에 언덕에 있음직한 그 풀꽃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절로는 신들린 가락으로 넘쳐흐르지 않겠는가 저 월매의 기와집 네 추녀 끝이 .. 더보기
4월의 詩: 소용돌이 땅을 파고 꽃씨를 묻으려다 꽃씨가 우는 것을 보았다. 뿌리 내려 다시 꽃피우기 두려운지 흙을 내려다보며 그 작은 평화를 천의 모양으로 부수고 있었다. 하늘이 흐렸다. 꽃씨 한 톨의 눈물이 나를 굴리며 세상 그득 낯선 불을 지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비는 오지 않고 한 톨의 꽃씨가 나를 빼앗아 태풍의 눈처럼 묻히고 있었다. 「소용돌이」 조은 詩集 『사랑의 위력으로』(민음사, 1991) 오래된 일기 속에 나를 사랑한다 말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청춘의 낯선 그늘과 어두운 골목들 사이 그들의 말들이 웅성거리며 날아오른다. 따뜻한 빛처럼 속삭이던 그들의 얼굴들 사이로 靑春이 너무 짙어 눈이 부시다. 그 눈부신 여름은 초록이 되고 그 초록은 나뭇잎이 된다. 보라, 인생의 청춘이 나뭇잎이 되는 그 과정.. 더보기
이 봄, 편지 둘 닿지 못한 편지 …… 지금 이 글을 읽으실 선생님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선생님은 필경 제가 모르는 감각과 사유, 경험을 하셨을 터이고, 그 같은 변화된 내면을 정리하면서 짐을 꾸리는 조금은 힘없는 손끝을 저는 느낍니다. 저는 편지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얼핏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어쩌면 한 달 후 델리에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쩌면 갈색의 물이 흐르는 江邊에 영원히 숨어버릴지도 모른다......같은. 선생님은 호텔 문 앞에서 눈물을 흘린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서 무엇을 하였을까 하는 점입니다. 선생님은 간디 이야기를 하셨지요. 저는 그러나 한 달 뒤인 지금 선생님이 인도에서 간디와 같은 만이 아닌 을 만났을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배는 안 고팠나요? 미지와의 만남은요.. 더보기
3월의 詩: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