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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가수로 태어나리라

 

 

 

비 오는 3호선 지하철 독립문역
나는 젖지 못한다

세계를 적시는 
비의 油田을 꿈꾸었으나

나, 메마르고 황량하다

가수는 태어나고
낡은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도대체 무슨 천국을 두 손가락으로 노래하겠다는 건가

죽음에게 전화나 걸지
음악에 몸을 맡겨 삼천 년 동안 표류하는 건 어때,
바다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나의 음악이야

가수는 흐르고
육체를 적시는
영혼의 저녁을 꿈꾸었으나

나, 모래처럼 외롭다

한없는 평행선
한없는 수평선
그리고 자동응답기 같은 날들

빗소리 들리지 않는
8층 공중 누각에서
혼자 흐느끼고
혼자 노래하고
혼자 커피포트에 물을 데우는 남자는
이미 죽은 남자이다

비 오는 20세기
남아 있는 고통 앞에서
나는 생을 젖지 못한다

혼자 블루스나 추며
석유로 뒤덮인 지구에서


「가수로 태어나리라」 
   박용하 詩集『바다로 가는 서른 세번 째 길』(문학과지성, 1995) 

 


 

 

어느 가수는 입을 다물고, 나는 노래를 하네. 오래된 모래알처럼 쉽게 가라앉지 않는,
기억들이 바람에 날아오르는 그 춤을 기억하네. 내가 부른 노래는 눈 먼 사람들의 등
불, 입을 다문 가수는 그 불빛을 따라 춤을 추네, 바람 위의 꽃잎처럼, 버들잎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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