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나무 썸네일형 리스트형 12월의 詩: 칠판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 더보기 11월의 詩: 처용 3장 1 그대는 발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그대 순결은 型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내는 나의 노래 나의 춤이다. 2 6월에 실종한 그대 7월에 산다화가 피고 눈이 내리고, 난로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다. 서촌 마을의 바람받이 서복쪽 늙은 홰나무, 맨발로 달려간 그날로부터 그대는 내 발가락의 티눈이다. 3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은 바다에서 온다. 생선가게의 납새미 도다리도 시원한 눈을 뜬다.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선 아침 하늘, 아직은 나의 순결이다. 「처용 3장」 김춘수 詩選集『처용』(민음사, 1974)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구름이 있던 근처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기억과 시간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 그.. 더보기 10월의 詩: 가을 편지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트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가을 편지」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 더보기 9월의 詩: 가을 기차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들국 가느다란 모가지 너머 저 빈 들 먼 끝머리 은빛 기차 한 가닥 천천히 가고 있다. 생각하면 엊그제 개나리 목련 피었다 서둘러 지고 라일락 진달래 아카시아 패랭이 분꽃 다알리아 명아주꽃 장미 나팔꽃이 또 줄지어 겨우겨우 따라왔다. 짧고 아름다웠던 보폭이여 어릴 적엔 그렇게 징검다리를 건넜다. 아이들의 어린 동생들도 다 빠지지 않고 건너면 오, 꽃 자욱한 메밀밭 희고 자잘한 기쁨이 가슴에 들에 많았다. 그렇게 봄 가고 여름 간 것일까. 생각하면 엊그제 더 많이 어둠고 소란스러웠던 날들은 발목을 풀고 떠난 물소리 같은 것. 어느 날은 문득 뒤가 비어 있고 죄 없고 눈물 없는 것들만이 뼈처럼 이어져 이 큰 둘레의 가을을 건너가고 있다.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 더보기 8월의 詩: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어떤 날은 노을이 밤새도록 계단을 오르내리죠 그 노을에 스친 술잔은 빛나기 시작하죠 그뿐이죠 그저 그뿐인 것에 시선이 가죠 술을 삼키거나 회를 삼킬 때마다 떴다가 지는 노을이에요 그의 목에 있는 노을을 건드리고 싶지만 내가 사는 곳은 동쪽이라 손댈 수 없죠 술을 마시고 마셔도 내 목에는 노을 지지 않죠 시간만 가죠 밤이 뛰어오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죠 노을 가까이에 다가갈 방법을 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 것도 알죠 그는 노을과 함께 곧 이 섬을 떠나죠 그뿐이고 그러니 오늘뿐이고 모든 것들은 원래 다 그렇죠 봄날의 꽃처럼 한철 잠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올해는 오늘까지만 아름답다, 이렇게요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햇살이 그대의 목.. 더보기 7월의 詩: 무늬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 가진 목숨들을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 더보기 6월의 詩: 역광의 세계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큰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있는 밤이었다 「역광의 세계」 안희연 詩集『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 *다니엘 포르 나는 내가 원하기만 .. 더보기 5월의 詩: 五月의 사랑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네 사는 마을 저 떠도는 흰구름들과 앞산을 깨우는 신록들의 연한 빛과 밝은 빛 하나로 넘쳐흐르는 강물을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푸른 새매 한 마리가 하늘 속을 곤두박질하며 지우는 이 소리 없는 선들을, 환한 대낮의 정적 속에 물밀듯 터져오는 이 화냥기 같은 사랑을 그러한 날 누이야, 수틀 속에 헛발을 디뎌 치맛말을 풀어 흘린 춘향이의 열두 시름 간장이 우리네 산에 들에 언덕에 있음직한 그 풀꽃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절로는 신들린 가락으로 넘쳐흐르지 않겠는가 저 월매의 기와집 네 추녀 끝이 .. 더보기 4월의 詩: 소용돌이 땅을 파고 꽃씨를 묻으려다 꽃씨가 우는 것을 보았다. 뿌리 내려 다시 꽃피우기 두려운지 흙을 내려다보며 그 작은 평화를 천의 모양으로 부수고 있었다. 하늘이 흐렸다. 꽃씨 한 톨의 눈물이 나를 굴리며 세상 그득 낯선 불을 지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비는 오지 않고 한 톨의 꽃씨가 나를 빼앗아 태풍의 눈처럼 묻히고 있었다. 「소용돌이」 조은 詩集 『사랑의 위력으로』(민음사, 1991) 오래된 일기 속에 나를 사랑한다 말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청춘의 낯선 그늘과 어두운 골목들 사이 그들의 말들이 웅성거리며 날아오른다. 따뜻한 빛처럼 속삭이던 그들의 얼굴들 사이로 靑春이 너무 짙어 눈이 부시다. 그 눈부신 여름은 초록이 되고 그 초록은 나뭇잎이 된다. 보라, 인생의 청춘이 나뭇잎이 되는 그 과정.. 더보기 3월의 詩: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 더보기 2월의 詩: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사랑법」 강은교 詩選集 『풀잎』(민음사, 1974) 사랑 속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이 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에서 태어났고, 그 바다는 침묵의 대지이다. 커다란 침묵의 힘, 언어의 충만함의 근원.. 더보기 1월의 詩: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詩集『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오늘은 어제의 내일, 그리고 나는 지금 노을이 지는 여기, 오늘에 있다. 오늘은 오늘이고 또 내일이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아니며 또한 나이기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허공에 올려놓는다. 그 고요한 순간, 찰나의 진공. 진공 속.. 더보기 이전 1 2 3 4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