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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7월의 詩: 무늬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 가진 목숨들을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 비로소 나는 기쁨의 사람으로 피어 오래도록 반짝일 수 있었습니다

봄날이어도 좋았고 어느 가난한 가을 날이어도 좋았습니다 그대 더 이상 내 사랑 아니었을 때 내 꽃밭은 저물고 노래의 강물 또한 거기쯤에서 그쳤습니다 문득 아무런 뜻도 아닌 목숨 하나 내 것으로 남아서 세상의 모든 저문 소리를 견디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지막 한 방울의 절망조차 비워내는 일이었으므로 내겐 내 순결한 슬픔을 묻어줄 어떠한 언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눈물마저 슬픔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서야 깨달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바람이 불고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나 너무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내 목숨에 흘러가 있는 기억의 저 아득한 무늬 위에 이제는 그대를 놓아주고 싶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목숨이 있거든 이쯤에서 나도, 그치고 싶습니다 스스로 소리를 버리는 악기처럼 고요하고 투명한, 무늬가 되고 싶습니다

 

 

 

무늬」 
  류근 詩集『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 2010)

 

 


 

독일의 잘쯔베델(Salzwedel) 지역에서 시작된 스핏 케이크(spit cake)의 일종인 바움쿠헨(Baumkuchen)은 이름 그대로 (바움=나무 + 쿠헨=장식이 없는 케잌) 나무의 나이테같은 무늬를 가졌다. 회전하는 원통에 반죽을 발라 구워질 때마다 계속 반죽을 덧붙여 굽기에 그런 무늬가 생기는 것이다. 나무는 어렸을 때 빨리 자라고 늙어서 천천히 자란다. 그래서 안쪽엔 넓은 간격이, 바깥쪽엔 좁은 간격의 나이테를 가졌다. 바움쿠헨의 무늬가 가질 수 없는 건 진짜 나무가 가신 세월의 간격이다. 오랜 시간, 세월이 세월을 읽고 그 세월의 시간 동안 내 안의 나이테가 천천히 무늬로 새겨질 때, 그대도 나도 같은 모양과 간격의 무늬를 가졌으리라, 나무가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여름에 더욱 더 푸르른.

 

 

바움쿠헨(Baumkuchen)

 

 


 

 

 

 

Betcha - July (July song from )

Life is just a poem that we write phrase by ph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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