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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詞集: 그림자와 빗장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한곳으로 모이는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천천히 걸어 들어간다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갑자기 거칠어진다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그 절망의 내용조차 .. 더보기
名詞集: 기억과 물방울 기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 길가에 서 있고그 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 더보기
名詞集: 길과 오후 길     1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 더보기
名詞集: 청춘과 별 그 계절에는 발바닥에 별들이 떴다발그레한 아이의 피부 같은,막 떠오른 별들로 가득한 벌판에서나는 말발굽을 주웠다밤마다 달빛에 비춰보며 꿈을 꾸었다벌판을 지나 하늘에 화살을 박는말 울음소리를벌판의 꽃들이 짓이겨진하늘로 달려 나간 푸른 바람을말발굽의 꽃물 범벅을내 잠 속으로 향내 나는 청마가 달려오며성운 가득 밴 냄새로별자리를 엮어갔다빛나는 말발굽에쩡쩡한 겨울 하늘도파편으로 흩어졌다우주가 내 발바닥으로 자욱하게 몰려드는푸른 연기로그러나 나는 이미 알았다꽃들이 어스름 속에서추억처럼 진해진다는 것을짓이겨진 꽃물이 사실은어스름이라는 것을말발굽이 놓여 있는빛의 길목으로지난 시절의 꿈들이 수줍은 듯그렇게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지나 가버리는 것에 대한 메모 」   박형준  詩集『 불탄 집 』 (천년의시작, 2013.. 더보기
名詞集: 노을과 향기 늦은 오후 그 산에 왜 갔는지, 아마 쓸쓸한 저녁을 기다렸는가봅니다...... 언젠가 당신이 노을을 상처에 빗대었지요 그 후 노을을 당신처럼 여기는 버릇이 생겼답니다 그러나 햇살을 피해 숲속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보랏빛 꽃무더기가 또렷이 길을 만들며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누가 꽃잎을 뿌려 먼 길을 만든 걸까 서늘한 고요가 숲의 공기를 당기고 있을 뿐 아무도 내 앞뒤에 없습니다 이제 사람이 두려운 건가요...... 꽃잎 따라 숲을 헤매었지요 차라리 보랏빛을 쫓았다는 게 더 어울립니다 마치 그 꽃잎의 흩어짐 끝에 노을과 당신이 있을 환상을 품고, 그래요 환상이지요...... 그러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금방 끝날 것 같은 그 길 어디선가 찬물을 뒤집어쓴 느낌, 느낌표의 풀꽃조차 나를 힐끗 쳐다보는 것, 그 지.. 더보기
名詞集: 가을과 깨달음 며칠 동안 무 도둑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만 하다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엄마 갔다 올게, 경아      오래 키운 개는 앞발에 턱을 괸 채 미동도 않았다 경이는 무 도둑을 보았을까 누가 지나가든 매사에 심드렁한 개는 그날도 뿌연 구름이 낀 눈을 깜박이며 하품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름 내내 물을 주고 가꾼 화단의 무가 모조리 뽑혀나간 그날 아침, 그런 날에도 버스는 제 시각에 도착하고 택배가 날아오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컴퓨터의 전원을 누르면 파스스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온다 먹다 남은 카레를 천천히 씹으며 생각했다 어쩌다가 무를 도둑맞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삼 년 전 어디선가 얻어왔다며 아버지가 던진 흰 봉투 속에는 씨앗들이 한가득이었는데 열심히 백과사전을 들추어봐도 도무지 무슨 씨앗인지.. 더보기
12월의 詩: 칠판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 더보기
11월의 詩: 처용 3장 1 그대는 발을 좀 삐었지만 하이힐의 뒷굽이 비칠하는 순간 그대 순결은 型이 좀 틀어지긴 하였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내는 나의 노래 나의 춤이다. 2 6월에 실종한 그대 7월에 산다화가 피고 눈이 내리고, 난로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다. 서촌 마을의 바람받이 서복쪽 늙은 홰나무, 맨발로 달려간 그날로부터 그대는 내 발가락의 티눈이다. 3 바람이 인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은 바다에서 온다. 생선가게의 납새미 도다리도 시원한 눈을 뜬다. 그대는 나의 지느러미 나의 바다다. 바다에 물구나무선 아침 하늘, 아직은 나의 순결이다. 「처용 3장」 김춘수 詩選集『처용』(민음사, 1974)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구름이 있던 근처라고 했는데 그랬는데, 기억과 시간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 그.. 더보기
10월의 詩: 가을 편지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트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가을 편지」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 더보기
9월의 詩: 가을 기차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들국 가느다란 모가지 너머 저 빈 들 먼 끝머리 은빛 기차 한 가닥 천천히 가고 있다. 생각하면 엊그제 개나리 목련 피었다 서둘러 지고 라일락 진달래 아카시아 패랭이 분꽃 다알리아 명아주꽃 장미 나팔꽃이 또 줄지어 겨우겨우 따라왔다. 짧고 아름다웠던 보폭이여 어릴 적엔 그렇게 징검다리를 건넜다. 아이들의 어린 동생들도 다 빠지지 않고 건너면 오, 꽃 자욱한 메밀밭 희고 자잘한 기쁨이 가슴에 들에 많았다. 그렇게 봄 가고 여름 간 것일까. 생각하면 엊그제 더 많이 어둠고 소란스러웠던 날들은 발목을 풀고 떠난 물소리 같은 것. 어느 날은 문득 뒤가 비어 있고 죄 없고 눈물 없는 것들만이 뼈처럼 이어져 이 큰 둘레의 가을을 건너가고 있다.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 더보기
8월의 詩: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어떤 날은 노을이 밤새도록 계단을 오르내리죠 그 노을에 스친 술잔은 빛나기 시작하죠 그뿐이죠 그저 그뿐인 것에 시선이 가죠 술을 삼키거나 회를 삼킬 때마다 떴다가 지는 노을이에요 그의 목에 있는 노을을 건드리고 싶지만 내가 사는 곳은 동쪽이라 손댈 수 없죠 술을 마시고 마셔도 내 목에는 노을 지지 않죠 시간만 가죠 밤이 뛰어오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죠 노을 가까이에 다가갈 방법을 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 것도 알죠 그는 노을과 함께 곧 이 섬을 떠나죠 그뿐이고 그러니 오늘뿐이고 모든 것들은 원래 다 그렇죠 봄날의 꽃처럼 한철 잠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올해는 오늘까지만 아름답다, 이렇게요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햇살이 그대의 목.. 더보기
7월의 詩: 무늬 ​​ ​ 그대를 사랑할 때 내 안에 피어 나부끼던 안개의 꽃밭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와서 배운 말씀으로는 이파리 하나 어루만질 수 없었던 안타까움으로 나 그대를 그리워하였습니다 나무들이 저희의 언어로 잎사귀마다 둥글고 순한 입술을 반짝일 때 내 가슴엔 아직 채 이름 짓지 못한 강물이 그대 존재의 언저리를 향해 흘러갔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대 빛나는 언저리에 이르러 뿌리가 되고 꽃말이 되고 싶었습니다 ​ 꽃밭의 향기와 강물의 깊이를 넘어 밤이 오고 안개를 적신 새벽이 지나갔습니다 내 그리움은 소리를 잃은 악기처럼 속절없는 것이었으나 지상의 어떤 빛과 기쁨으로도 깨울 수 없는 노래의 무늬 안에 꿈꾸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썩어 이룩하는 무늬, 이 세상 모든 날개 가진 목숨들을 무늬, 그 아프고 투명한 무늬를 나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