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썸네일형 리스트형 6월의 詩: 역광의 세계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큰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있는 밤이었다 「역광의 세계」 안희연 詩集『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 *다니엘 포르 나는 내가 원하기만 .. 더보기 5월의 詩: 五月의 사랑 누이야 너는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가 오월의 저 밝은 산색이 청자를 만들고 백자를 만들고 저 나직한 능선들이 그 항아리의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누이야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네 사는 마을 저 떠도는 흰구름들과 앞산을 깨우는 신록들의 연한 빛과 밝은 빛 하나로 넘쳐흐르는 강물을 너 또한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푸른 새매 한 마리가 하늘 속을 곤두박질하며 지우는 이 소리 없는 선들을, 환한 대낮의 정적 속에 물밀듯 터져오는 이 화냥기 같은 사랑을 그러한 날 누이야, 수틀 속에 헛발을 디뎌 치맛말을 풀어 흘린 춘향이의 열두 시름 간장이 우리네 산에 들에 언덕에 있음직한 그 풀꽃 같은 사랑 이야기가 절로는 신들린 가락으로 넘쳐흐르지 않겠는가 저 월매의 기와집 네 추녀 끝이 .. 더보기 4월의 詩: 소용돌이 땅을 파고 꽃씨를 묻으려다 꽃씨가 우는 것을 보았다. 뿌리 내려 다시 꽃피우기 두려운지 흙을 내려다보며 그 작은 평화를 천의 모양으로 부수고 있었다. 하늘이 흐렸다. 꽃씨 한 톨의 눈물이 나를 굴리며 세상 그득 낯선 불을 지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비는 오지 않고 한 톨의 꽃씨가 나를 빼앗아 태풍의 눈처럼 묻히고 있었다. 「소용돌이」 조은 詩集 『사랑의 위력으로』(민음사, 1991) 오래된 일기 속에 나를 사랑한다 말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청춘의 낯선 그늘과 어두운 골목들 사이 그들의 말들이 웅성거리며 날아오른다. 따뜻한 빛처럼 속삭이던 그들의 얼굴들 사이로 靑春이 너무 짙어 눈이 부시다. 그 눈부신 여름은 초록이 되고 그 초록은 나뭇잎이 된다. 보라, 인생의 청춘이 나뭇잎이 되는 그 과정.. 더보기 3월의 詩: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 더보기 2월의 詩: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사랑법」 강은교 詩選集 『풀잎』(민음사, 1974) 사랑 속에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이 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에서 태어났고, 그 바다는 침묵의 대지이다. 커다란 침묵의 힘, 언어의 충만함의 근원.. 더보기 1월의 詩: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詩集『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오늘은 어제의 내일, 그리고 나는 지금 노을이 지는 여기, 오늘에 있다. 오늘은 오늘이고 또 내일이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아니며 또한 나이기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허공에 올려놓는다. 그 고요한 순간, 찰나의 진공. 진공 속.. 더보기 12월의 詩: 4월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지의 별빛과 제국 빌딩의 녹슨 첨탑과 꽃눈 그렁그렁한 목련 가지를 창 밖으로 내민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어루만지던 봄날에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 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1월과 3월 사이의 침묵을 물수제비 뜨며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5월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는 천사가 위로차 내 방을 방문했다가 "내 차라리 악마가 되고 말지"하고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심리 상담사가 "오늘은 어때요?" 물으면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문장들을 노트 위에 적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물론 7월에도……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 더보기 11월의 詩: 폭우와 어제 우산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다 모자를 쓴 사람이 있다 그건 나였을 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 뿌리가 깊어서 꺽이지 않는 나무구나 비는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불투명한 얼굴 내일 또 공원에 갈 것이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잠깐씩 어제를 생각할 것이다 어제는 구름같고, 쟁반같고, 빙하같고, 비탈 같고, 녹고 있는 소금같다. 햇빛에 투명해지는 초록같고, 안부를 묻는 부케같고, 부은 손 같다. 상한 빵 같고, 어랜 개의 솜털 같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다. 어제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공원 앞 찻집에 앉으면 또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제는 어제를 버릴 수가 없었다 가방에 담긴 것이 무.. 더보기 10월의 詩: 호두 숲속에 떨어진 호두 한 알 주워서 반쪽으로 갈랐다 구글맵조차 상상 못한 길이 그 안에 있었다 아, 이 길은 이름도 마음도 없었다 다만 두 심방, 두 귀 반쪽으로 잘린 뇌의 신경선, 다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있는 지명이 욕망의 표현이 가고 싶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는 꿈의 욕망이 영혼을 욕망하는 속삭임이 안쓰러워 내가 그대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속에 난 길을 깨뭅니다 오랫동안 입안에는 기름의 가을빛이 머뭅니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 더보기 9월의 詩: 부활 내 너를 찾어왔다…臾娜. 너참 내앞에 많이있구나. 내가 혼자서 鍾路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닥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臾娜, 이것이 멫萬時間만이냐. 그날 꽃喪阜 山넘어서 간다음 내눈동자 속에는 빈하눌만 남드니, 매만져볼 머릿카락 하나 머릿카락 하나 없드니, 비만 자꾸 오고…燭불 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열고가면 江물은 또 멫천린지, 한번가선 소식 없던든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鍾路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볓에 오는애들.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 그들의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臾娜! 臾娜! 臾娜! 너 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구나. 「復活부활」 서정주詩集『花蛇集화사집]』(南蠻書庫.. 더보기 8월의 詩: 수박씨 호박씨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즛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니빨로 밝는다 수박씨 호박씨를 입에 넣는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人情이 깃들인 것이다 태산泰山의 구름도 황하黃河의 물도 예님군의 땅과 나무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뵈이는 것이다 이 적고 가부엽고 갤족한 희고 까만 씨가 조용하니 또 도고하니 손에서 입으로 입에서 손으로 오르나리는 때 벌에 우는 새소리도 듣고 싶고 거문고도 한 곡조 뜯고 싶고 한 五千오천 말 남기고 함곡관函谷關도 넘어가고 싶고 기쁨이 마음에 뜨는 때는 희고 까만 .. 더보기 7월의 詩: 침묵 바이러스 나는 말비듬이 떨어진 당신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당신은 말들을 두 손 가득 담아 내 몸에 뿌려주었다. 눈을 맞은 나무처럼 꼿꼿이, 이 거리에 함께 서 있던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넸을 때, 당신은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 썼 다. 라디오 앞에 귀를 내어놓은 애청자처럼, 나는 당신의 사연을 읽어주는 DJ가 됐을지도 모 를 일이다. 그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몸져 누웠을 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이었을 수도 있다. 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결백을 입증 하는 데에 말이 더 무력한 탓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줄기만 남은 담쟁이들조차 시멘트벽을 부둥 켜 안고 말없이 열렬히 .. 더보기 이전 1 2 3 4 5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