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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月의 詩: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굴참나무숲 너머 자작나무숲이 아름다운 날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태풍이 그 나무 속에 있다 나는 길 위에 있고 파도는 길 밑의 길까지 밀려온다 나는 태양을 향해 걷고 태양은 내가 걷지 않는 길까지도 걷는다 그것을 음악이라 이름 부르면 삶은 더욱 깊어진다 바다로 가는 길 위에는 단지 세 그루의 나무만 서 있다 나무에 황혼이 없다고 믿는 사람의 영혼에도 나무 세 그루는 서 있다 이 길 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대가 이 세상 한구석에 골목처럼 접혀 있어도 구석은 이미 보석과 같다 나는 길 위에 있고 길은 내 밑의 사랑 위에 있다 태양의 빛이 끝나는 길 위에는 달빛의 길 또한 흐르고 있고 수평선이 하늘로 빠지는 다섯번째 둔덕에서 부는 휘파람은 스산하다 그때 내가 읽었던 소설은 누가 바람을 .. 더보기
7月의 詩: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 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 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 말아 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이성복 詩集 『남해 금산』(문학과지성, 1986) 中에서 34년이 .. 더보기
6月의 詩: 봄이 씌다 노랑꽃들과 분홍꽃들과 갈색 덤불 위에 너의 연록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화롭고 우아한 여린 초록이 내 눈에 씌었다. 보도 블록에도 버스표 판매소에도 마주오는 사람의 얼룩에도 지나가는 버스에도 건너편 유리벽에도 허공에도 하늘에도 너의 그림자가 어룽댄다. 세상이 너의 어룽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소리는 무엇일까? 이것은 소리일까? 이 기분 좋은, 조용히 부풀었다가 잦아들고 하는 이 것은 너의 호흡 햇빛 속에 여려졌다 짙어지는 녹색의 현들. 오늘 나는 온종일 상냥하다. 너의 그림자 속에서, 휘늘어진 너의 가지들은 햇빛 속에서 주의 깊고 온순하게 살랑거렸다. 내 마음은 그 살랑거림 속에서 살랑거린다. 너의 이파리들 속에 얼굴을 파묻고 오래도록 너를 껴안고 싶다. 너의 여림과 고즈넉함이 나의 몸에 베일 .. 더보기
5月의 詩: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 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웃기만 했어 얼마나 오래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웃기만 했어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나는 오 년 뒤에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질 거야 그날은 시장에서 사과를 고를 때보다도 더 아무 날이 아닐 것이고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더 아무 감정도 별다른 일도 없겠지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中에서 나와 .. 더보기
아몬드에 나를 더하라 헤아려라, 너를 깨어 있게 했던 고통스러웠던 것을, 그것에 나를 더하라. 네가 눈을 떴을 때,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았을 때, 내 너의 눈을 찾아 비밀스런 실 한 가닥 자으니, 네가 잊지 않던 이슬은 그것을 타고, 누구의 가슴에도 이르지 못한 말씀이 지키는, 단지로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너는 너의 것인 그 이름 안으로 온저히 들어섰다, 당당한 걸음으로 너 자신을 향햐여 갔다, 너의 침묵의 종을 달아 둔 누각 안에서 채가 한껏 흔들렸다, 귀기울여 듣던 말이 너에게 와 닿았고, 죽은 것이 너와 어깨동무를 하고, 너까지 셋이서 너의는 저물녘을 지나갔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라. 아몬드에 나를 더하라. 「아몬드를 헤아려라」 파울 첼란 詩選集 『죽음의 푸가』(청하, 1986) 中에서 파울 첼란은 아도르노가 비인간.. 더보기
4月의 詩: 황무지 황무지(The Waste Land) ─ T.S. 엘리엇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 '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湖)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 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더보기
3月의 詩: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더보기
詩와 길의 이야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2月의 詩: 네가 그리울 때만 환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설 때면 불현듯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불우한 약속처럼 돌아왔다 이처럼 어설픈 아픔도 그리움이 될 수 있던가 아픔은 흉터처럼 또렷해서 상처나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 돌아오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 봄에 피는 꽃들은 무슨 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한밤중이 지나면 소문처럼 네가 피었다 네가 그리울 때만 나는 환했다 「목련이 필 때면」 박찬호 詩集『나는 네가 그리울 때만 환했다』(문학의전당, 2019) 中에서 어긋나는 건 시간 뿐일까. 스치듯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너와 내가 어긋나고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잘못 읽은 탓이다. 그래서 그대와 나는 여기 다른 시간에 서있다. 짙은(Zitten) | 곁에 더보기
빛과 길 사이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 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 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 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 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 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꾀병」 박준 詩集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 中에서 몸이 아플 때면 살아있다.. 더보기
오늘의 그대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나 기다리고 있었는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기쁨이여」 허수경 詩集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 2005) 슬픈 기쁨, 허수경의 슬픔은 거대한 이 세계의 질서에서 소박한 내면을 통해 정제된 삶.. 더보기
좋은 밤 밤이 올 때까지 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책장을 덮으면 밤은 이미 문지방 너머에 도착해 있다 얼마나 많은 동굴을 섭렵해야 저토록 검고 거대한 눈이 생기는가 매번 다른 사투리로 맞이하는 밤 밤은 날마다 고향이 달랐다 밤이 왔다 밤의 시계는 매초마다 문 잠그는 소리를 낸다 나를 끌고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 낮의 일을 떠올린다 노인은 물속에 묻히고 싶다며 자전거를 끌고 연꽃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은 살 수 있었다고 최고의 악동은 살아남는다고 지구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반드시 만날 거라고 밤의 배 속에서 돌들이 식는다 나의 차가운 혀도 뜨거운 무언가(無言歌)를 삼키리라 낮엔 젊었고 밤엔 늙었다 낮에 노인을 만났고 밤에 그 노인이 됐다 밤은 날마다 좋은 밤이었다 「좋은 밤」 심보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