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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장례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은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두빛 흐린 물결로 네 몸 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 썩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죽음은 때로 섬을 집어삼키려 파도 치며 밀려온다 석 자 세 치 물고기들 섬 가까이 배회할 것이다, 물밑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자의 어록을 들추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말자, 다만 해안선 가득 부서지는.. 더보기
저녁 나무의 그림자는 길어진다 우리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와 구름의 물결이 숲 위에서 걷혀지기를 그래서 이제 우리가 낮의 숨결을 바꿀 시간이기를 아직 저녁이었다 해는 여전히 냉정하게 두 팔을 산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누구는 뗏목을 타고 왔고 걸어왔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눈부셨다 그러나 이 저녁에 참으로 투명한 이 날에 선택받은 자는 누구인가 목수가 될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기다렸다 해가 지고 숲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중략...) 저녁이 오면 나는 창가에 앉아 한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또 한 그루의 나무가 그림자를 뻗어 서로 맞닿는다 그 그늘 속에는 설탕을 나르는 곤충들과 이상한 새와 공을 잡으러 가는 여자아이들도 있고 알 수 없는 또 다른 무엇.. 더보기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당신 몸 흐르는 물소리 깊습니다 생각 더욱 깊어지고 완강해지는 눈빛, 나는 당신의 상실을 봅니다 내게 타인이라고 말하지 않던 당신 마음 언저리 썰렁하게 비어가고 풀벌레 소리 빈자 리를 채웁니다 이제는 당신 작은 뜨락조차 채울 수 없는 나의 달빛인지요 달빛으로 채우려했 던 당신, 어둠으로 넘쳐 다공의 내 뼈 속을 채웁니다 내가 당신을 향해 희망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나를 향해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당신 몸 속에서 만나 강물처럼 소 용돌이치며 흘렀습니다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김윤배 詩集 『강깊은 당신 편지』(문학과 지성.1991) 이와 혀와 내 목을 울리는 바람,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당신을 부르던 때,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더보기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 바람이 구름 속에서 깊게 울린다 비가 오는데, 얼굴이 흘러 있는 자들이 무언가 품에 하나씩 안고 헌책방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책을 책장의 빈 곳에 쓸쓸하게 꽂는다 그러곤 아무도 모르게 낡아가는 책을 한 권 들고 펼친다 누군가 남긴 지문들이 문장에 번져 있다 마음이 이곳에서 나귀의 눈처럼 모래 속을 스몄던 것일까 봉인해 놓은 듯 마른 꽃잎 한 장, 매개의 근거를 사라진 향기에게서 찾고 있다 떨어져 나간 페이지들이 책에 떠올라 보이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책을 펴고 조용히 불어넣었을 눅눅한 휘파람들이 늪이 돼 있다 작은 벌레들의 안구 같기도 하고 책 속에 앉았다가 녹아내린, 작은 사원들 같기도 한 문자들이 휘파람에 잠겨 있다 나무들을 흔들고 물을 건너다가 휘파람은 이 세상에 없는 길로만 흘러가고 흘러온다 대륙을.. 더보기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詩集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2003) 내 마음은 꽃들이 잃어버린 집이다. 지금 보이는 꽃들은 내 마음의 그림자다. 꽃들에게 집이 없다는 것은 내 마음의 집이 없다는 것이다. - 이성복 더보기
꽃차례 천체는 현존합니다 질량이 불변하듯이 가장자리에서부터 혹은 위에서부터 피어나듯이 꽃 한송이의 섭리는 불변합니다 들여다보면 항상 비어있는 지상 타인의 눈물과 핏물을 받아 마시며 제가 끌려 다니는 동안도 행성은 타원의 궤도를 돌고······ 이 한 몸과 마음이 때때로 추레하여 가슴에 별 하나 품고 살아가게 하듯이 슬픔의 벼랑 끝에서 곱게 핀 당신을 찾아내듯이 꽃, 한 송이 천체여 이승의 기나긴 밤에도 당신과 맺어져 있어 저는 살아 있는 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꽃차례」 이승하 詩集『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세계사,1991) 행성과 행성의 거리는 빛이 도달하는 속도로 가늠할 만큼 넓다. 그 한없는 간극 사이를 소박하게 가늠할 수 있는 거리로 줄여 오래된 추억과 빛바랜 노트에 적혀있는 낙서와 기억나지 않는.. 더보기
설경 雪景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장의 수의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는 걸 일러주는 눈밭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 부린다 「雪景」 황지우 詩集『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 1990) 눈이 펑펑 내리던 기억만 있다. 그 거리를 앞질러 가던 가로등과 그림자들. 8월에 그 겨울을 불러내다. 더보기
가수로 태어나리라 비 오는 3호선 지하철 독립문역 나는 젖지 못한다 세계를 적시는 비의 油田을 꿈꾸었으나 나, 메마르고 황량하다 가수는 태어나고 낡은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도대체 무슨 천국을 두 손가락으로 노래하겠다는 건가 죽음에게 전화나 걸지 음악에 몸을 맡겨 삼천 년 동안 표류하는 건 어때, 바다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나의 음악이야 가수는 흐르고 육체를 적시는 영혼의 저녁을 꿈꾸었으나 나, 모래처럼 외롭다 한없는 평행선 한없는 수평선 그리고 자동응답기 같은 날들 빗소리 들리지 않는 8층 공중 누각에서 혼자 흐느끼고 혼자 노래하고 혼자 커피포트에 물을 데우는 남자는 이미 죽은 남자이다 비 오는 20세기 남아 있는 고통 앞에서 나는 생을 젖지 못한다 혼자 블루스나 추며 석유로 뒤덮인 지구에서 「가수로 태어나리라」 박용하 詩集.. 더보기
저녁의 수련 무엇을 느끼니? 숨차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 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데, 연인의 하얀 얼굴 위로 눈꺼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수련의 꽃잎이 닫히고 있는데, 종소리, 종소리, 빗방울이 때리는 불길한 물-종소리, 멀리 있는 연못-물이 검푸른 빗줄기 끝에서 활짝 핀 수련처럼 시늉하며 뛰어오르는데, 만년필아, 하얀 종이야,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저 수련이 저녁의 한숨 속으로 꺼져들면 텅 빈 스크린처럼 하얗게 나의 느린 삶이 남을 것이니,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처럼. 「저녁의 수련」 채호기 詩集『수련』(문학과지성, 2002) 뚱뚱한 만년필이 주는 포만감에 흠뻑 취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만년필이 사랑하는 종이와 그 종이가 그리워.. 더보기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문학과지성, 1983) 그녀는 20년전 6월, 그녀의 詩의 고향이었던 지리산 뱀사골로 .. 더보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에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더보기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휴일」이라는 노래들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가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