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구름 속에서 깊게 울린다 비가 오는데, 얼굴이 흘러 있는 자들이 무언가 품에 하나씩 안고 헌책방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책을 책장의 빈 곳에 쓸쓸하게 꽂는다 그러곤 아무도 모르게 낡아가는 책을 한 권 들고 펼친다 누군가 남긴 지문들이 문장에 번져 있다 마음이 이곳에서 나귀의 눈처럼 모래 속을 스몄던 것일까 봉인해 놓은 듯 마른 꽃잎 한 장, 매개의 근거를 사라진 향기에게서 찾고 있다 떨어져 나간 페이지들이 책에 떠올라 보이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책을 펴고 조용히 불어넣었을 눅눅한 휘파람들이 늪이 돼 있다 작은 벌레들의 안구 같기도 하고 책 속에 앉았다가 녹아내린, 작은 사원들 같기도 한 문자들이 휘파람에 잠겨 있다 나무들을 흔들고 물을 건너다가 휘파람은 이 세상에 없는 길로만 흘러가고 흘러온다 대륙을 건너오는 모래바람 속에도 누군가의 휘파람은 등에처럼 섞인다 나는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본다 마을을 바라보는 짐승들의 목젖이 박쥐처럼 젖어 있다 나는 그때 식물이 된 막내를 업고 어떤 저녁 위로 내 휘파람이 진화되어 고원을 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서 바라보던 밤의 저수지, 인간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나던 부뚜막의 한기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면 누이야 자전거를 세워두고 나는 너보다 작은 휘파람을 불어보기도 했다 그런 때에 휘파람에선 어떻게 환한 아카시아 냄새가 나는지 쇠속을 떠난 종소리들은 어떻게 손톱을 밀고 저녁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지 누이야 지금은 네 딸에게 내가 휘파람을 가르치는 사위 쓸쓸한 입술의 냄새를 가진 바람들이 절벽으로 유배된 꽃들을 찾아간다 절벽과 낭떠러지의 차이를 묻는다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
김경주 詩集『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2006)
낡고 버려진, 하지만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 하나 오롯이 남아 내 잠을 휘젓고 있다.
아 불면의 날들, 그런 불안을 어루만지는 차고 하얀 손이여,
이 쓸모없는 욕심으로부터 나를 꺼내줄. 작고 나직한 아카시아냄새, 휘파람처럼 가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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