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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詩: 꽃차례 천체는 현존합니다 질량이 불변하듯이 가장자리에서부터 혹은 위에서부터 피어나듯이 꽃 한송이의 섭리는 불변합니다 들여다보면 항상 비어있는 지상 타인의 눈물과 핏물을 받아 마시며 제가 끌려 다니는 동안도 행성은 타원의 궤도를 돌고······ 이 한 몸과 마음이 때때로 추레하여 가슴에 별 하나 품고 살아가게 하듯이 슬픔의 벼랑 끝에서 곱게 핀 당신을 찾아내듯이 꽃, 한 송이 천체여 이승의 기나긴 밤에도 당신과 맺어져 있어 저는 살아 있는 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꽃차례」 이승하 詩集『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세계사, 1991)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이 충만하기를 꿈꾼다. 그 충만함이 만족과 행복, 안락 혹은 편안함으로 치환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 더보기
5월의 詩: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더보기
4월의 詩: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꽃봉오리를 맺은 장미는 작년에도 귓볼을 붉혔었다. 강가에서 모래성을 쌓던 아이들이 자라나 블루 진 차림으로 겉멋을 부리지만 정작 희망은 그전의 낱말일는지 모른다. 숲은 아직도 울창한가 짚지붕 처마자락에 매달린 고드름의 카랑카랑한 차가움은 기억 저편에서 빛난다. 미상불 잃을 것 없는 여인이 봄 화장을 하는 동안 시간은 소리없이 하르르 지고 살아서 백년, 죽어서도 백년인 주목나무가 둥치만 남겨진 채 산그림자 속에 묻혀간다. 찬란함은 아무래도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신중신 詩集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 1998) 찬란(燦爛), 고풍스러운 담벼락에 기댄 먼 옛날을 기억이었거나 은여울 호수 위의 빛처럼 눈부시게 빛이었거나. 그 때를 기억.. 더보기
3월의 詩: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러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습니다.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신대철 詩集『무인도를 위하여』(문학과지성, 1977) 어떤 날들이 있었다. 지난한 시간들, 몇 개의.. 더보기
2월의 詩: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 더보기
1월의 詩: 인사 Salut 아무 것도 아닌 것, 이 거품은, 이 때 묻지 않는 시는 술잔을 가리킬 뿐, 저기 멀리 해정(海精)의 떼들 수없이 몸을 뒤집으며 물속에 잠긴다. 오 나의 다양한 친구들아 우리는 함께 항행하며 나는 벌써 선미(船尾)에 자리 잡는데 그대들은 장려한 선수(船首)에서 우레와 찬 겨울의 물결을 가른다, 아름다운 취기에 못 이겨 배의 요동도 두려워 않고 나는 일어서서 이 축배를 바친다 고독, 암초, 별을 무엇이든 우리의 돛이 감당한 백색의 심려에 값하는 것에게. 「인사 Salut」 스테판 말라르메 詩集 『목신의 오후』(민음사, 1974)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탄생과 죽음, 잠재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기능적 활동으로서의 존재적 증명을 요구한다. 가끔씩 우리는 새로운 시작에 서게 된다.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시.. 더보기
12월의 詩: 너, 없이 희망과 함께 너는 왔고 이 세기의 어느 비닐영혼인 나는 말한다, 빌딩 유리 벽면은 낮이면 소금사막처럼 희고 밤이면 소금이 든 입처럼 침묵했다 심장의 지도로 위장한 스카이라인 위로 식욕을 잃어 버린 바람은 날아갔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모든 비닐영혼은 말한다, 너, 없이 나는 찻집에 앉아 일금 3유로 20센 트의 희망 한 잔을 마셨다, 구겨진 비닐영혼은 나부꼈다, 축축한 반쯤의 태양 속으로 너는 왔는데도 없구나, 새롭고도 낡은 세계 속으로 나는 이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잃었고 아버지의 기일에 돋는 태양은 너무나 무서웠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비닐영혼은 말한다, 네 손에서는 손금이 비처럼 내렸지 네가 왔을 때 왜 나는 그때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손가락 관절 마디마다 돋아드는 그림자로 저 완강한 손금비를 후려치지 않았을.. 더보기
11월의 詩: 걸리버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검은 그림자 사이를 다녀올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혀지는 마음으로 + 출구 없는 삶에 문을 그려넣는 마음이었을 도처의 소.. 더보기
10월의 詩: 가을의 소네트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9월의 詩: 일찍 피는 꽃들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 언젠가는 찾아 헤맬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진 듯하다 서슴없이 등져버린 것들이 기억 속에서 앓고 있는 곳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 꽃나무 어딘가에 있는 듯 나는 신호등을 놓치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일찍 피는 꽃들」 조은 詩集 『생의 빛살』 (문학과지성, 2010) 화사한 봄날, 꽃대궁 밀어내는 꽃은 스스로를 뒤집어 삶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놓는다. 삶의 순간이 다할 때까지 이 모든 속과 겉, 안과 밖의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삶의 슬픔을.. 더보기
8월의 詩: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지난주까지 이방의 병원에 있었습니다 끼니마다 나오는 야쿠르트를 넘기며 텅 빈 세계뉴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나날이었어요 병원 옆에는 강이 하나 있다고 하나 강물은 제 갈 길을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돌려 병원 옆 강에는 무성한 풀이 돋고 발 달린 물고기들이 록밴드처럼 울고 있었어요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피곤한 눈 대신 귀가 당신의 편지를 읽었어요 아마도 이웃집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는 빌려온 연인인가봅니다 빌리는 시간이 그냥 지나쳐버릴까봐 기타리스트는 기타의 심장에다 혀를 가져다 대고 있는데 아버지는 또 군대를 그곳으로 보냈나요 소리 없이 그곳으로 보냈나요 그래서 아이들은 부엌에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며 오래된 동화책에다 물을 주고 있나요 어제는 하릴없이 마흔 살에 죽었다는 철학자의 초상을 들여다 보.. 더보기
7월의 詩: 슬픔없는 앨리스는 없다 매일매일이 축제이니 우울해하지 마 각설탕같이 움츠러들지 마 설탕 가루 같은 모래바람이 휘날린다 피로감이 끈적거린다 슬픔 없는 해는 없다 슬픔 없는 달도 없다 사랑한 만큼 쓸슬하고 사람은 때에 맞게 오고 갈 테니 힘들어도 슬퍼하지 마 어디에 있든 태양 장미를 잃지 마 너를 응원하는 나를 잊지 마 「슬픔없는 앨리스는 없다」 신현림 詩集 『반지하 앨리스』 (민음사, 2017)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을 태우며 기우뚱 환상을 보는 동안 앨리스는 커다란 구멍으로 끝없는 낙하를 했다. 원죄의 고독, 그 쓸쓸한 확인을 위해서 기꺼이 오랜 시간의 비행을 감수했다. 가녀린 숨결이었으면, 바람에 한없이 나풀대는 깃털이었으면, 그래서 끝없는 가벼움으로 이 세상을 건넜으면. 그런 앨리스에게 누군가 묻는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