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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8월의 詩: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지난주까지 이방의 병원에 있었습니다

끼니마다 나오는 야쿠르트를 넘기며 텅 빈 세계뉴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나날이었어요

병원 옆에는 강이 하나 있다고 하나

강물은 제 갈 길을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돌려 병원 옆 강에는

무성한 풀이 돋고 발 달린 물고기들이 록밴드처럼 울고 있었어요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피곤한 눈 대신 귀가 당신의 편지를 읽었어요

아마도 이웃집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는 빌려온 연인인가봅니다

빌리는 시간이 그냥 지나쳐버릴까봐

기타리스트는 기타의 심장에다 혀를 가져다 대고 있는데

아버지는 또 군대를 그곳으로 보냈나요

소리 없이 그곳으로 보냈나요

그래서 아이들은 부엌에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며

오래된 동화책에다 물을 주고 있나요

어제는 하릴없이 마흔 살에 죽었다는 철학자의 초상을 들여다 보고 있었어요

어제는 하릴없이 스무살에 죽었다는 시인의 몸에 대한 환상을 읽고 있었어요

까르륵거리며 새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고

도르륵거리며 다람쥐들은 철근공사판에서 돌아오는 나날이었지요

울까봐 두려워 잠을 자지 않았어요

꿈이면 언제나 울었거든요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허수경 詩集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지금도 뉴스에서는 먼 곳의 어딘가에선 총부리를 겨눈 사람들 곁으로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은 절망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순종해야하는 질서와 가치가 뒤바뀌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지켜야하고 존중받아야할 존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치가들이 자국의 혹은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 커다란 테이블 위에 선을 긋는 순간 그 선들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야했다. 역사는 무엇을 위해서 씌어지는가. 선들 긋던 이들은 자신의 선택을 믿었을 것이다. 최선의 선택, '훗날 역사는 나를 지지하고 기억해 줄 것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세계에 난민들이 떠돌고 있다. 시리아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남미에서 삶의 최소한의 존엄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험난한 여정을 떠나고 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착한 나라도 그들의 땅은 아니며 목숨을 보존했다고 해도 그 뒤에 따라올 인종적, 종교적, 계급적 핍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라를 잃어버린 자의 설움은 길고 어둡다."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계절을 떠나가는 시간들 동안 세상이 소란스러워 고스란히 집에만 남겨져 있었습니다. 청춘을 어깨동무하고 보냈던 그리고 한동안 소식이 없던 친구의 부고가 도착하고 또 다른 지인의 부고가 연달아 도착한 후에야 나는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세상 너머에 내가 만들었던 시간과 공간의 기억, 기억의 도파민이 가져다 준 찬란한 순간의 반짝이는 빛. 당신의 편지...당신...그렇게 부르고 나면 잠깐 동안 세상에 비추던 그런 빛. 그 안에서 기타를 치는 기타리스트와 동화책에 물을 주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새들이 다람쥐들이 제각각의 길을 뛰어다니고 나는 꺼져가는 그대의 빛을 연신 살리느라 분주합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더이상 꿈꾸지 않기 위해, 잠들면 언제나 울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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