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
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웃기만 했어
얼마나 오래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웃기만 했어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나는 오 년 뒤에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질 거야
그날은
시장에서 사과를 고를 때보다도 더
아무 날이 아닐 것이고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더 아무 감정도
별다른 일도 없겠지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中에서
나와 나의 꽃은 사랑하고 또 미워하지요. 삐뚤어진 꽃잎은 사랑스럽지만 징그럽기도 합니다. 그런 꽃은 나를 바라봅니다. 그럴 때면 나는 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아니 내가 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의 꿈을 꿀때마다 나는 빈 자리에 스치는 바람을 봅니다. 꽃항아리를 만들고 허공에 몸을 던진 도공은 그 결핍을 안아보고 싶었던 것일까요. 언젠가 나는 오랜 도보의 길 끝으로 나도 아니고 꽃도 아닌 당신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몽글
몽글
꽃구름
아래
보드란
봄풀
공부하고 일하고 영화보고 음악을 듣고 숨을 쉬고.
집콕 8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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