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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나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벽지(壁紙)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때까지.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詩全集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문학과지성, 2019) 中에서

 

 


지금 읽으면 너무 현학적인 수사들이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어린 날의 이 시는 아름다웠다. 사랑은 어두운 그늘 안에서 더욱 아름답고 오래 기억된다. 바람을 따라 흘러가기만을 바랬던 시간 속에서 오롯이 부여잡고 있던 기억이 산산히 사라지던 날, 거두지 못해 서성이던 사랑도 함께 사라졌다. 돗을새김으로 남긴 그런 결들이 남아 세월이 되고 아직도 가끔은 기억하지 못한 생각이 되어 가슴 한켠을 다시 저릿하게 한다. 


공부하고 일하고 영화보고 음악을 듣고 숨을 쉬고, 가끔 외출하고.

집콕 13주째.



 

Pajaro Sunrise | Romeo's Tu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