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비듬이 떨어진 당신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당신은 말들을 두 손 가득 담아 내 몸에
뿌려주었다. 눈을 맞은 나무처럼 꼿꼿이, 이 거리에 함께 서 있던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넸을 때, 당신은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 썼
다. 라디오 앞에 귀를 내어놓은 애청자처럼, 나는 당신의 사연을 읽어주는 DJ가 됐을지도 모
를 일이다.
그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몸져 누웠을
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이었을 수도 있다. 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결백을 입증
하는 데에 말이 더 무력한 탓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줄기만 남은 담쟁이들조차 시멘트벽을 부둥
켜 안고 말없이 열렬히 침묵했다. 그럴 땐 태양조차 꿈을 꾸도 있었으리라. 백만 킬로와트 전
력으로도 환히 밝혀질 리 없는 순백의 꿈이거나 밝혀서는 아니될 알몸의 꿈. 매초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꿈. 같은 자리에 오래 서있던 사람들이 햇빛 받은 나무처럼 온몸이 쑥쑥 크는 거신증
같은 꿈.
벌을 선 채로 우리는 꿈속으로 들어가길 갈구했다. 돌맹이와 돌맹이처럼 조개껍질과 조개껍
질처럼 서로의 꿈속으로 들어가 사지를 포갠 채 말을 대신하기를. 당신이 듣고 싶은 한마디가
입에서 나오질 않는다. 할 말을 하지 않아서 나는 신열을 앓고, 당신에게 가는 버스는 끊기고,
막차를 놓친 사람들과 함께 이 겨울을 받아내며 나는 서서히 얼어간다. 눈은 쌓여 어깨가 버겁
다. 막차가 떠난 밤거리는 말의 끝자리와 같았다. 첫말과 끝말의 그 사이.
귀가 백만 개의 잎사귀로 태어나는 새벽. 손이 백만 개의 날개로 퍼득대며 날아오르는 새벽,
당신이 쏟아낼 말들이 기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제대로 된 자세로 몰매를 맞아보려고 손을
뻗어 라디오를 끈다.
「침묵 바이러스」
김소연 詩集『눈물이라는 뼈』(문학과지성, 2009)
당신의 얼굴은 침묵과 말 사이의 마지막 경계선이다. 당신의 얼굴에 파도와 갈매기와 바다가 흐른다. 그리고 당신의 침묵 속에 내가 있다. 당신이 묵묵히 지켜낸 말이 침묵 속에서 자라나 더 큰 세상의 줄기가 되고 나무가 되어 나의 뒤뜰과 꽃들 사이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흩어지고 버려진 세상 속에서 온전히 나를 나의 세계로 다시 돌려보내는 시간, 당신은 세상과 나의 사이에 침묵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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