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과나무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결코 눈뜨지 마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송재학 詩集『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민음사, 1997)

 

 


 

 

사랑, 백수광부의 도하처럼 건너가버린 지난 기억.
그래도 가끔 홑잠 속에서 나를 간지럽히는 들뜬 숨결로 환하게 웃던 너를 만날 때가 있다.
봄날의 곰처럼, 게으른 행복이 잠시 스쳐가는 그런 꿈으로.

 

 

'시인과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의 詩: 칠판  (4) 2023.12.10
11월의 詩: 처용 3장  (6) 2023.11.24
10월의 詩: 가을 편지  (18) 2023.10.15
9월의 詩: 가을 기차  (9) 2023.09.09
8월의 詩: 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22) 2023.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