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과나무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바가 되는 지 .. 더보기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背景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 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 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 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姿 勢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 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詩集『三南에 내리는 눈』(민음사, 1975) 中에서 **************************************.. 더보기
쓸쓸한 날에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을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더보기
달팽이의 집 집이 되지 않았다 도피처가 되지도 않았다 보호색을 띠고 안주해버림이 무서웠다 힘겨운 짐 하나 꾸리고 기우뚱 기우뚱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얼굴을 내밀고 살고 싶었다 속살을 물 위에 싣고 춤추고 싶었다 꿈이 소박하면 현실은 속박쯤 되겠지 결국은 힘겨운 짐 하나 벗으러 가는 길 희망은 날개로 흩어진 미세한 먹이에 불과한 것이다 최초의 본능으로 미련을 버리자 또한 운명의 실패를 감아가며 덤프 트럭의 괴력을 흉내라도 내자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쉬운 것은 물 속에 잠겨 있어도 늘 제자리는 안될걸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입으로 깨물면 부서지고 마는 연체의 껍질을 쓰고도 살아갈 수 있다니 「달팽이의 꿈」 이윤학 詩集『먼지의 집』(문학과지성, 1993) -본인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요? "시는 계속 쓸 것이고 밥.. 더보기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制壓제압하는 노고지리가 自由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의 말은 修正수정되어야 한다 自由를 위해서 飛翔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 김수영 詩集『巨大한 뿌리』(민음사, 1974) 詩는 정치적 의미의 실제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개인적 의미로 축소시킨다면 '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으리라.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김수영,「그 방을 생각하며」)라고 詩人은 이야기했지만, 또한 그 변화, 방을 잃고 그와 관계되는 허접한 것들을 일시에 '상실'하게된 나의 변.. 더보기
횡단 그날은 줄곧 혼자 걷기만 하였던 외로운 날이었다, 사람들아. 주위에 친구들 있었으나 그들 모두 떠나고 없는 것 같았다. 아주 매서운 바람 받으며 산으로 올라갔는데 입고 있는 외투는 모기장처럼 엷기만 했다. 계곡으로 내려가서 차가운 시냇물을 건넜는데 내가 건너야 했던 시냇물은 상상했던 거와는 달랐으며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은 시냇물을 막아주지 못했더. 이윽고 나는 초원으로 나섰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그 초원에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은 줄곧 혼자 걷기만 하였던 외로운 날이었다, 사람들아 바로 내 주위에 친구들 함께 있었으나 그들 모두 다 떠나고 없는 것 같았다. 「횡단」 L. Huges 詩集, 박태순 譯『아메리칸 니그로 斷章』(민음사 세계시인선, 1977) 더보기 Crossing It was t.. 더보기
기념식수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 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 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우만져 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들은 너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