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바가 되는 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 詩集『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 1989)
미안하지만 이젠 희망을 노래하리라 이야기합니다. 그 얘길 듣고 분명 편하게 잠들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꿋꿋이 희망을 노래할 것입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
나뭇잎 한 장의 두께 만큼 얇은 길이지만, 어쩌면 나는 절망을 희망으로 삼아 노래하고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이미 늙은 나는 젊음의 심산한 가슴을 쓸어내릴 필요도 없을 것
이고 익숙한 몸짓으로 어깨에 앉은 슬픔을 가볍게 툭, 툭, 털어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
다. 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 영혼을 잠식하게 하는 불안의 또 다른 영혼입니다. 그런
희망을 노래하는 나는 이 어두운 정거장에 검은 구름만큼 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