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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꽃차례 천체는 현존합니다 질량이 불변하듯이 가장자리에서부터 혹은 위에서부터 피어나듯이 꽃 한송이의 섭리는 불변합니다 들여다보면 항상 비어있는 지상 타인의 눈물과 핏물을 받아 마시며 제가 끌려 다니는 동안도 행성은 타원의 궤도를 돌고······ 이 한 몸과 마음이 때때로 추레하여 가슴에 별 하나 품고 살아가게 하듯이 슬픔의 벼랑 끝에서 곱게 핀 당신을 찾아내듯이 꽃, 한 송이 천체여 이승의 기나긴 밤에도 당신과 맺어져 있어 저는 살아 있는 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꽃차례」 이승하 詩集『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세계사,1991) 행성과 행성의 거리는 빛이 도달하는 속도로 가늠할 만큼 넓다. 그 한없는 간극 사이를 소박하게 가늠할 수 있는 거리로 줄여 오래된 추억과 빛바랜 노트에 적혀있는 낙서와 기억나지 않는.. 더보기
녹, 기다림 기다림이 무작정 나를 녹슬게 하지는 않는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그래서 나를 지층의 단계로 끌어내리는 그런 기다림이 나를 낡게 한다. 결국엔 이렇게 자리에 박혀 거둘 수 없는 날들을 세며 바람이 데려가리를 기다리는 풍화의 시간. 뜨거운 마음 안, 흩어져 있던 마음들을 모아 눈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슬픔이 그 기다림에 깃들게 하리라.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사의 핑경 소리가 요즘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더보기
설경 雪景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장의 수의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는 걸 일러주는 눈밭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 부린다 「雪景」 황지우 詩集『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 1990) 눈이 펑펑 내리던 기억만 있다. 그 거리를 앞질러 가던 가로등과 그림자들. 8월에 그 겨울을 불러내다. 더보기
가수로 태어나리라 비 오는 3호선 지하철 독립문역 나는 젖지 못한다 세계를 적시는 비의 油田을 꿈꾸었으나 나, 메마르고 황량하다 가수는 태어나고 낡은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도대체 무슨 천국을 두 손가락으로 노래하겠다는 건가 죽음에게 전화나 걸지 음악에 몸을 맡겨 삼천 년 동안 표류하는 건 어때, 바다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나의 음악이야 가수는 흐르고 육체를 적시는 영혼의 저녁을 꿈꾸었으나 나, 모래처럼 외롭다 한없는 평행선 한없는 수평선 그리고 자동응답기 같은 날들 빗소리 들리지 않는 8층 공중 누각에서 혼자 흐느끼고 혼자 노래하고 혼자 커피포트에 물을 데우는 남자는 이미 죽은 남자이다 비 오는 20세기 남아 있는 고통 앞에서 나는 생을 젖지 못한다 혼자 블루스나 추며 석유로 뒤덮인 지구에서 「가수로 태어나리라」 박용하 詩集.. 더보기
저녁의 수련 무엇을 느끼니? 숨차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 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데, 연인의 하얀 얼굴 위로 눈꺼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수련의 꽃잎이 닫히고 있는데, 종소리, 종소리, 빗방울이 때리는 불길한 물-종소리, 멀리 있는 연못-물이 검푸른 빗줄기 끝에서 활짝 핀 수련처럼 시늉하며 뛰어오르는데, 만년필아, 하얀 종이야,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저 수련이 저녁의 한숨 속으로 꺼져들면 텅 빈 스크린처럼 하얗게 나의 느린 삶이 남을 것이니,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처럼. 「저녁의 수련」 채호기 詩集『수련』(문학과지성, 2002) 뚱뚱한 만년필이 주는 포만감에 흠뻑 취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만년필이 사랑하는 종이와 그 종이가 그리워.. 더보기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문학과지성, 1983) 그녀는 20년전 6월, 그녀의 詩의 고향이었던 지리산 뱀사골로 .. 더보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에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더보기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휴일」이라는 노래들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가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더보기
The Road not Taken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ally .. 더보기
조그만 사랑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에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의 눈 「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詩集『三南에 내리는 눈』(민음사, 1975) 먼 곳에서 눈 소식을 듣는다. 오래지 않은 저 사진의 기억에도 눈이 있었다. 사월의 어느 날, 봄밤 한없이 내리던 눈, 그 안에 따뜻하게 내려앉던 달빛과 검은 밤의 공기. 더보기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미」 김수영 詩集『巨大한 뿌리』(민음사, 1974) 이렇게 스산한 구절이 있을까.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이라니. 설움에 몸을 태울 만큼 나는 더 이상의 기대를 만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있는 중이고, 좌절과 분노에서 오는 그런설움에 나는 새카맣게 타버리고 있는 것이구요, 나를 설웁게 하는 이 세계가 나를 염세하게 만드는 중이구요, 바람결에 날리는 거미줄, 매달린 까만 거미처럼 그렇게 하늘하늘 세상에 매달려 있구나 싶은 거랍니다. 거미하면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 더보기
봄, 몸 거기에도 햇볕의 힘 가닿는구나 어지럼증 한바퀴 내 몸을 돌아나간다 기억이 맑은 에너지일 수 있을까 식은 숭늉같은 봄날이 간다 이 질병의 언저리에 궁핍한 한세월, 봄빛의 맨 아래에 깔린다 죽음이 이렇게 부드러워지다니 이 기억도 곧 벅차질 터인데 햇빛은 지금 어느 무덤에 술을 불어넣으며 할미꽃 대궁 밀어올리는가 그 무덤들 보이지 않지만 문 밖까지 굴러와 있는 것 같아서 살아 있음은, 이렇게 죽음에게 허약하구나 아픔으로 둥글어지는 젖은 몸, 그리고 조금씩 남은 봄, 자글자글 햇빛이 탄다 「봄, 몸」 이문재 詩集『산책시편』(민음사, 1993) 봄날, 따뜻하고 환한 햇살의 여운이 길게 밤까지 이어집니다. 포근한 봄밤...이 봄도 또 한 세월로 가고 바람따라 흘러가는 것들에 줄을 서겠죠. 생명에서 죽음으로, 햇볕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