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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하늘에는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는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가지 쉬고 있는 구름과 그 구름 속, 곧 비가 될 물방울들은 모여 강물이 되고 새들이 그 안에서 바람이 된다 그리고 다시 바람이 새가 되고 강물이 되고 구름이 되는 네 안에는 그런 고요한 폭풍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햇살이 길러낸 침엽수림 이파리처럼 서서 맴도는 나... 두번 째 ● Arms by Christina Perri 더보기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五十燭(오십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않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 더보기
비가.2 -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 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빠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있다. .. 더보기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만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奇蹟 아녀 「발작」 황지우 詩集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 1998) 中에서 ************************************************************************************************** 삶의 모습들, 어느 한 꾸러미로도 묶을 수 없는 '엄청한 다름'이 세상을 다르게 하는 힘이다. 당신은 나와 다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그 아름다운 일을 .. 더보기
네가 없는 곳 지금은 네가 없는 곳 하아얀 바람만 불에 타는 곳 여름해만 못 견디게 부서지는 곳 이따금 칼이 우는 곳 다시는 부를 수 없는 네가 아아 바람이 자는 곳 맨드라미도 자는 곳 저주받은 사랑만 불에 타는 곳 사랑마저 팔아버린 밤이 있는 곳 비겁하게 비겁하게 떠나 온 곳 개미처럼 살자고 너를 껴안던 곳 지금은 네가 없는 곳 허나 밤이면 억세게 나를 깨우는 네가 있는 곳! 「네가 없는 곳」 이승훈 詩集 『당신의 방』(문학과지성, 1986) 中에서 *********************************************************************************** 네가 떠난 자리에 여운은 남아 냄새로 남는다. 지천으로 흐드러진 꽃이 되고 나비가 된 기억은 그렇게 피어나는 봄과 함께 .. 더보기
꽃이 핀다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를 만나는 일 저처럼이면 좋다 「꽃이 핀다」 문태준 詩集 『가자미』(문학과지성, 2006) 中에서 ****************************************************************************** 꽃이 피는 일, 그리워하는 일. 내가 소소히 만들어냈던 무수한 작은 일들, 그리고 그 기억들. 그리운...... 가끔은...... 더보기
바닷가의 장례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은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두빛 흐린 물결로 네 몸 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 썩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죽음은 때로 섬을 집어삼키려 파도 치며 밀려온다 석 자 세 치 물고기들 섬 가까이 배회할 것이다, 물밑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자의 어록을 들추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말자, 다만 해안선 가득 부서지는.. 더보기
저녁 나무의 그림자는 길어진다 우리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와 구름의 물결이 숲 위에서 걷혀지기를 그래서 이제 우리가 낮의 숨결을 바꿀 시간이기를 아직 저녁이었다 해는 여전히 냉정하게 두 팔을 산 위에 얹어놓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누구는 뗏목을 타고 왔고 걸어왔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눈부셨다 그러나 이 저녁에 참으로 투명한 이 날에 선택받은 자는 누구인가 목수가 될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기다렸다 해가 지고 숲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중략...) 저녁이 오면 나는 창가에 앉아 한 나무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또 한 그루의 나무가 그림자를 뻗어 서로 맞닿는다 그 그늘 속에는 설탕을 나르는 곤충들과 이상한 새와 공을 잡으러 가는 여자아이들도 있고 알 수 없는 또 다른 무엇.. 더보기
은행잎을 노래하다 그래도 열 손가락으로 헷갈리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 세다 세상을 뜬다는 것 얼마나 자지러진 휘모리인가. 갓 뜬 노랑 은행잎이 사람과 차(車)에 밟히기 전 바람 속 어디론가 뵈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것! 갑자기 환해진 가을 하늘 철근들 비죽비죽 구부정하게 서 있는 정신의 신경과 신경 사리로 온통 들이비쳐 잠시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고 길 건너려다 말고 벗은 몸처럼 서 있어도 홀가분할 때, 땅에 닿으려다 문득 노랑나비로 날라올라 막 헤어진 가지를 되붙들까 머뭇대다 머뭇대다 손 털고 날아가는 저 환한 휘모리, 저 노래! 「은행잎을 노래하다」 황동규 詩集『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2003) 어떤 우연이 나에게, 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커다랗고 둥근 기다림을 줄 것인가 그 둥근 기다림 속 너를 환한.. 더보기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당신 몸 흐르는 물소리 깊습니다 생각 더욱 깊어지고 완강해지는 눈빛, 나는 당신의 상실을 봅니다 내게 타인이라고 말하지 않던 당신 마음 언저리 썰렁하게 비어가고 풀벌레 소리 빈자 리를 채웁니다 이제는 당신 작은 뜨락조차 채울 수 없는 나의 달빛인지요 달빛으로 채우려했 던 당신, 어둠으로 넘쳐 다공의 내 뼈 속을 채웁니다 내가 당신을 향해 희망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나를 향해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당신 몸 속에서 만나 강물처럼 소 용돌이치며 흘렀습니다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김윤배 詩集 『강깊은 당신 편지』(문학과 지성.1991) 이와 혀와 내 목을 울리는 바람,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당신을 부르던 때, 당신이 나의 언어이던 때...... 더보기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 바람이 구름 속에서 깊게 울린다 비가 오는데, 얼굴이 흘러 있는 자들이 무언가 품에 하나씩 안고 헌책방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책을 책장의 빈 곳에 쓸쓸하게 꽂는다 그러곤 아무도 모르게 낡아가는 책을 한 권 들고 펼친다 누군가 남긴 지문들이 문장에 번져 있다 마음이 이곳에서 나귀의 눈처럼 모래 속을 스몄던 것일까 봉인해 놓은 듯 마른 꽃잎 한 장, 매개의 근거를 사라진 향기에게서 찾고 있다 떨어져 나간 페이지들이 책에 떠올라 보이기 시작한다 비가 오면 책을 펴고 조용히 불어넣었을 눅눅한 휘파람들이 늪이 돼 있다 작은 벌레들의 안구 같기도 하고 책 속에 앉았다가 녹아내린, 작은 사원들 같기도 한 문자들이 휘파람에 잠겨 있다 나무들을 흔들고 물을 건너다가 휘파람은 이 세상에 없는 길로만 흘러가고 흘러온다 대륙을.. 더보기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75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이성복 詩集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2003) 내 마음은 꽃들이 잃어버린 집이다. 지금 보이는 꽃들은 내 마음의 그림자다. 꽃들에게 집이 없다는 것은 내 마음의 집이 없다는 것이다. - 이성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