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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나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 더보기
6月의 詩: 봄이 씌다 노랑꽃들과 분홍꽃들과 갈색 덤불 위에 너의 연록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화롭고 우아한 여린 초록이 내 눈에 씌었다. 보도 블록에도 버스표 판매소에도 마주오는 사람의 얼룩에도 지나가는 버스에도 건너편 유리벽에도 허공에도 하늘에도 너의 그림자가 어룽댄다. 세상이 너의 어룽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소리는 무엇일까? 이것은 소리일까? 이 기분 좋은, 조용히 부풀었다가 잦아들고 하는 이 것은 너의 호흡 햇빛 속에 여려졌다 짙어지는 녹색의 현들. 오늘 나는 온종일 상냥하다. 너의 그림자 속에서, 휘늘어진 너의 가지들은 햇빛 속에서 주의 깊고 온순하게 살랑거렸다. 내 마음은 그 살랑거림 속에서 살랑거린다. 너의 이파리들 속에 얼굴을 파묻고 오래도록 너를 껴안고 싶다. 너의 여림과 고즈넉함이 나의 몸에 베일 .. 더보기
5月의 詩: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너에게 불쑥, 하나의 세상이 튀어나왔을 때 나에게는 하나의 세상이 움푹, 꺼져버렸어 그날부터 웃기만 했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지 원래 어둠 속에 있는 건 잘 보이질 않지 빛을 비추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 웃기만 했어 얼마나 오래 이럴 수 있을까 정말 웃기만 했어 처음으로 검은 물을 마셨을 때 빈자리의 결핍을 보았어 결핍에게 슬쩍 전화를 걸었는데 받았어, 받았어 결핍이 맞았던 거지 나는 오 년 뒤에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질 거야 그날은 시장에서 사과를 고를 때보다도 더 아무 날이 아닐 것이고 골목을 떠도는 누런 개의 꼬리보다도 더 아무 감정도 별다른 일도 없겠지 「빛이 밝아서 빛이라면 내 표정은 빛이겠다」 이원하 詩集『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문학동네, 2020) 中에서 나와 .. 더보기
아몬드에 나를 더하라 헤아려라, 너를 깨어 있게 했던 고통스러웠던 것을, 그것에 나를 더하라. 네가 눈을 떴을 때,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았을 때, 내 너의 눈을 찾아 비밀스런 실 한 가닥 자으니, 네가 잊지 않던 이슬은 그것을 타고, 누구의 가슴에도 이르지 못한 말씀이 지키는, 단지로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너는 너의 것인 그 이름 안으로 온저히 들어섰다, 당당한 걸음으로 너 자신을 향햐여 갔다, 너의 침묵의 종을 달아 둔 누각 안에서 채가 한껏 흔들렸다, 귀기울여 듣던 말이 너에게 와 닿았고, 죽은 것이 너와 어깨동무를 하고, 너까지 셋이서 너의는 저물녘을 지나갔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라. 아몬드에 나를 더하라. 「아몬드를 헤아려라」 파울 첼란 詩選集 『죽음의 푸가』(청하, 1986) 中에서 파울 첼란은 아도르노가 비인간.. 더보기
4月의 詩: 황무지 황무지(The Waste Land) ─ T.S. 엘리엇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 '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湖)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 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더보기
3月의 詩: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더보기
기다림이 그대를 기다리는 오후 가을 나무처럼 말라가는 햇빛이 서 있었다 관촉사 입구에 늘어선 가판대엔 기념품 파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 다만 한 할머니 먼지를 뒤집어쓴 목각불처럼 미소 짓고 있다 명부전이 둥글게 숨을 쉬고 있었다 황급히 빠져나오다 미륵불 과 마추쳤다 돌 속 에 갇힌 백제의 凡夫가 두 눈을 지그시 뜨고 기다리는 여인 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할머니는 그저도 있었다 그녀를 스쳐가자 갑자기 등뒤로 왁자지껄한 터 소리가 들리고 닭이며 돼지가 나다니며 흥에 겨 운 씨름판 함성이 떠들썩하다 목메인 흐느낌이 아련히 들려왔다 전 저를 파먹 으며 살아요 당신을 기다리며 영원히 햇빛은 그녀 얼굴에서 앳된 분홍잎을 찾 아내고 있었다 「은진엔 기다림이 있다」 윤의섭 詩集 『천국의 난민』(문학동네, 2000) 中에서 네가 오기로 한.. 더보기
2月의 詩: 네가 그리울 때만 환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설 때면 불현듯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불우한 약속처럼 돌아왔다 이처럼 어설픈 아픔도 그리움이 될 수 있던가 아픔은 흉터처럼 또렷해서 상처나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 돌아오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 봄에 피는 꽃들은 무슨 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한밤중이 지나면 소문처럼 네가 피었다 네가 그리울 때만 나는 환했다 「목련이 필 때면」 박찬호 詩集『나는 네가 그리울 때만 환했다』(문학의전당, 2019) 中에서 어긋나는 건 시간 뿐일까. 스치듯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너와 내가 어긋나고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잘못 읽은 탓이다. 그래서 그대와 나는 여기 다른 시간에 서있다. 짙은(Zitten) | 곁에 더보기
돌아가는 먼 길, 不醉不歸 어느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不醉不歸 」 허수경 詩集 『혼자가는 먼 집』(문학과지성, 1992) 中에서 오래전 길들인 .. 더보기
생일주간 얼굴 없는 아버지에게 모우터싸이클을 타고 가을의 환한 햇빛 속을 달려나갈 때 나는 녹슬어버렸다 그건 당신의 이마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것인데 당신은 얼굴이 없으므로 그 돌은 명중할 수 없다 오늘 나의 생일에 창문마다 불빛 하나씩 내다 건 거리의 끝에서 자욱한 새벽 안개 속에서 내가 당신의 어두운 윤곽으로 거리를 나올 때 당신은 나에게 무어라 잔등 두드리겠는가 나의 물그릇은 아침에 버리는 물 속에 함께 내버려져 저녁 가을 강이 붉게 녹스는 것을 도와 주고 바다가 소금을 결정할 때 손쉽게 모여 소금이 될 것이다 한낮 가득한 돌들이 무거워지는 낯익은 소리들 자욱한 소리들 모우터싸이클을 타고 햇빛의 밖에서 저녁으로 달려올 때 당신은 아직 얼굴 없는 산이다 불타는 가을 산이다 「생일주간」 이문재 詩集『내 젖은 구.. 더보기
종이얼굴 가는 곳마다 햇빛이 무너졌다 얼마나 더 입술 깨무는 날들이 찾아올 것인가 그리고 종이가면이 펄럭거린다 누군가 지나가고 나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본다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저녁의 나뭇잎, 저녁의 검은 새 왜 그럴까? 피가 부르는 피가 부르짖는 소리를 따라가보면 산사태지면서 타오르는 수천의 꽃, 꽃잎파리들 고요하여라, 저녁 햇빛속 거닐며 너의 무덤 너의 뿌리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평선 서녘부터 동녘에 이르기까지 한떼의 소나기가 빛의 속도로 말달려간다 새로운 태양아래 강과 대지가 솟아오르려면 아직 천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한 생애가 뜻없이 불타오르는 동안 내 넋의 대장간에서 달궈지는 이 피묻은 사랑 씨줄 날줄로 얽어져 있는 세월의 무게 고스란히 끌어안으면 갑자기, 사과나무처럼 네가 보고 싶.. 더보기
아름다운 사냥 왜가리는 왜가리 그가 선 채로 나를 겨냥했을 때 나는 한 마리 왜가리 하늘은 푸른 하늘 일순의 번갯불에 멎고 싶었다 그러나 돌을 줍고 던지지 않고 다시 등에 총을 꽂고 벌판 끝 나는 그의 머리 위를 배회하였다 하늘과 벌판이 맞닿는 곳에 가 쉬면서 그의 뜨거우나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야 했다 왜가리 그가 선 채로 나를 겨냥했을 때 나는 그의 영역에 떠도는 과녁 정맥 뛰는 정수리에도 나는 그를 기다렸다 못박히고 싶어 호흡을 멈추고 한 마리 그는 돌을 줍고 던지지 않고 담배를 문다 그 매연의 바위와 숲과 자연 그가 찾는 황금의 재가 되기 위하여 나는 자연 속에 있지만 오오 아픈 날개여 팔 한때는 현란한 눈부시던 먹장구름 이젠 땅으로 내리는 길도 막힌 것 같아 구름과 구름이 맞닿는 그 곳으로 가없는 왜가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