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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성녀(聖女) - 스테판 말라르메 옛적에 플루트나 만돌린과 더불어 반짝이는 그녀의 비올라의 도금이 벗겨진 오래된 비단목을 감추고 있는 창문에, 옛적에 저녁 예배와 만도(晩禱) 때면 넘쳐 나던 성모 찬가의 오래된 책을 펼쳐 놓고 보여 주는 창백한 성녀가 있어 섬세한 손가락뼈를 위하여 천사가 저녁 비상으로 하프를 퉁기는 성체현시대 같은 창유리에 오래된 백단목도 없이 오래된 책도 없이, 악기 날개 위로 손가락을 놀리는 침묵의 악사가 되어 「성녀(聖女)」 스테판 말라르메 詩集『오후의 목신』(민음사, 1974, 김화영 譯) À la fenêtre recélant Le santal vieux qui se dédore De la viole étincelant Jadis flûte ou mandore Est la sainte pâle, étalant .. 더보기
12월의 詩: 너, 없이 희망과 함께 너는 왔고 이 세기의 어느 비닐영혼인 나는 말한다, 빌딩 유리 벽면은 낮이면 소금사막처럼 희고 밤이면 소금이 든 입처럼 침묵했다 심장의 지도로 위장한 스카이라인 위로 식욕을 잃어 버린 바람은 날아갔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모든 비닐영혼은 말한다, 너, 없이 나는 찻집에 앉아 일금 3유로 20센 트의 희망 한 잔을 마셨다, 구겨진 비닐영혼은 나부꼈다, 축축한 반쯤의 태양 속으로 너는 왔는데도 없구나, 새롭고도 낡은 세계 속으로 나는 이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잃었고 아버지의 기일에 돋는 태양은 너무나 무서웠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비닐영혼은 말한다, 네 손에서는 손금이 비처럼 내렸지 네가 왔을 때 왜 나는 그때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손가락 관절 마디마다 돋아드는 그림자로 저 완강한 손금비를 후려치지 않았을.. 더보기
11월의 詩: 걸리버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검은 그림자 사이를 다녀올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혀지는 마음으로 + 출구 없는 삶에 문을 그려넣는 마음이었을 도처의 소.. 더보기
어떤 경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10월의 詩: 가을의 소네트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9월의 詩: 일찍 피는 꽃들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 언젠가는 찾아 헤맬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진 듯하다 서슴없이 등져버린 것들이 기억 속에서 앓고 있는 곳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 꽃나무 어딘가에 있는 듯 나는 신호등을 놓치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일찍 피는 꽃들」 조은 詩集 『생의 빛살』 (문학과지성, 2010) 화사한 봄날, 꽃대궁 밀어내는 꽃은 스스로를 뒤집어 삶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놓는다. 삶의 순간이 다할 때까지 이 모든 속과 겉, 안과 밖의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삶의 슬픔을.. 더보기
8월의 詩: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지난주까지 이방의 병원에 있었습니다 끼니마다 나오는 야쿠르트를 넘기며 텅 빈 세계뉴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나날이었어요 병원 옆에는 강이 하나 있다고 하나 강물은 제 갈 길을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돌려 병원 옆 강에는 무성한 풀이 돋고 발 달린 물고기들이 록밴드처럼 울고 있었어요 어제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피곤한 눈 대신 귀가 당신의 편지를 읽었어요 아마도 이웃집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는 빌려온 연인인가봅니다 빌리는 시간이 그냥 지나쳐버릴까봐 기타리스트는 기타의 심장에다 혀를 가져다 대고 있는데 아버지는 또 군대를 그곳으로 보냈나요 소리 없이 그곳으로 보냈나요 그래서 아이들은 부엌에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며 오래된 동화책에다 물을 주고 있나요 어제는 하릴없이 마흔 살에 죽었다는 철학자의 초상을 들여다 보.. 더보기
오래 전의 일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트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가을 편지」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 더보기
7월의 詩: 슬픔없는 앨리스는 없다 매일매일이 축제이니 우울해하지 마 각설탕같이 움츠러들지 마 설탕 가루 같은 모래바람이 휘날린다 피로감이 끈적거린다 슬픔 없는 해는 없다 슬픔 없는 달도 없다 사랑한 만큼 쓸슬하고 사람은 때에 맞게 오고 갈 테니 힘들어도 슬퍼하지 마 어디에 있든 태양 장미를 잃지 마 너를 응원하는 나를 잊지 마 「슬픔없는 앨리스는 없다」 신현림 詩集 『반지하 앨리스』 (민음사, 2017) 성냥팔이 소녀가 불꽃을 태우며 기우뚱 환상을 보는 동안 앨리스는 커다란 구멍으로 끝없는 낙하를 했다. 원죄의 고독, 그 쓸쓸한 확인을 위해서 기꺼이 오랜 시간의 비행을 감수했다. 가녀린 숨결이었으면, 바람에 한없이 나풀대는 깃털이었으면, 그래서 끝없는 가벼움으로 이 세상을 건넜으면. 그런 앨리스에게 누군가 묻는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 더보기
6월의 詩: 여우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섬과 섬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에나 사이가 있다 여우와 여우 사이 별과 별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사이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 물과 물고기에게는 사이가 없다 바다와 파도에는 사이가 없다 새와 날개에는 사이가 없다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사이가 없는 그곳으로 「여우 사이」 류시화 詩集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열림원, 1996)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사이'만큼의 공간이 있고 섬과 섬 사이에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만큼의 '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공간과 거리만큼의 물리적 위치에 비례해 환산되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물리적 공간과 거리가 시간으로 환산되는 만큼, 두 물체간의 시간은 또한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 관계는 두 상관물의 독립적 존재로서 상대적이다... 더보기
5月의 詩: G·마이나 물 닿은 곳 神恙의 구름밑 그늘이 앉고 杳然한 옛 G·마이나 김종삼「G·마이나 ㅡ 全鳳來兄에게」 미술을 색과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던 모더니즘 미술가들에게 음악은 가장 이상적인 예술이었다. 그들이 형태를 너머 추상으로 달려갔던 것은 물질적인 形과 態에 제한을 두지 않는 음악을 닮기 위해, 범위없는 자유로움으로 어떤 공간이든 시간으로든 한없이 날아가 우리의 마음에 날아와 앉을 수 있는 음악의 자유로움을 미술 안에 가져다 놓기 위함이었다. 벙거지 모자의 늙은 시인은 그런 음악을 종이 위로 날아와 앉게 한다. 자살한 文友*를 추억하며 그가 청해 들으며 죽었던 바흐의 선율을 종이에 옮겨적으며 문장 사이 그 공간에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을 극도의 절제된 감정으로 담았다. '물이 닿'은 곳, 神恙(신양), .. 더보기
사랑의 몫 내가 하나의 갈대라면 그대는 다만 바람이어야 했다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람이 바람을 몰고오는 바람의 속, 그대는 나의 바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내가 강가에 피어난 한 포기의 여린 풀로 있을 때 그대는 거대한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끝없는 강풍이어야 했다. 바람도 없고 바람이 흔드는 소리도 없는 이 미친 돌개바람의 속, 그대는 무풍의 바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내가 이름 없는 별이 되어 한줄기 어둠으로 화하고 있을때 흔들리며 바로잡는 조그마한 죄, 그대는 나의 형벌 영원한 나의 바람이어야 했다. 「사랑의 몫」 박정만 詩集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오상사, 1989) 사랑아, 네가 있다면 그래야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너는 바람이 바람을 몰고 오는 바람의 속, 바람만이 아닌 그 진실의 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