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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사랑의 몫

 

 


내가 하나의 갈대라면
그대는 다만 바람이어야 했다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람이 바람을 몰고오는
바람의 속,
그대는 나의 바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내가 강가에 피어난
한 포기의 여린 풀로 있을 때
그대는 거대한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끝없는 강풍이어야 했다.
바람도 없고
바람이 흔드는 소리도 없는
이 미친 돌개바람의 속,
그대는 무풍의 바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내가 이름 없는 별이 되어
한줄기 어둠으로 화하고 있을때
흔들리며 바로잡는 조그마한 죄,
그대는 나의 형벌
영원한 나의 바람이어야 했다.


「사랑의 몫」
   박정만 詩集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오상사, 1989) 



사랑아, 네가 있다면 그래야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너는 바람이 바람을 몰고 오는 바람의 속, 바람만이 아닌 그 진실의 의미로, 나를 영원히 흔들며 죽은 사회에서 오롯이 깨어있을 수 있도록 나를 바로잡아야 했다. 힘없는 존재로 세상에서 작게 흔들리고 있을 때 무위의 힘으로 나를 어루만지는 거대한 힘이어야 했다. 사랑아,  뜨겁고 다정하고 온화하고 아름답고 또 거칠고 난폭하고 매서운 너의 눈 속에서 나는 다만 너의 고요한 세상의 진실에 담기고 싶었다. 세상 속 사랑에 눈 멀고 귀 멀어 아름답고 싶기만 했던 내가, 결국 사랑을 잊고 낭하의 어둠으로 내려앉았어도 사랑아 너는 거기에 있어라, 내 영원한 원죄로.

 

 

 

*시인 박정만(1946-1988)은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겨울 속 봄 이야기>가 당선되어 시단에 등단했다. 1972년엔 문화공보무 문예작품 공모에 詩 <등불설화>, 동화 <봄을 심는 아이들>이 당선되기도 했다.  

1981년 5월 소설가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욕망의 거리」필화사건 (한수산 필화사건)에 무고하게 연류되어 한수산, 정규웅 등과 함께 보안사령부에 연행, 3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 고문 후유증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퇴직과 이혼 이라는 개인사적 고통을 겪었고 병마에 시달렸다. 죽기 위해, 시를 쓰기 위해 술로 연명하던 그는 결국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던 날 간경화로 타계했다. 

 

박정만의 시는 70/80년대 한국시의 전개 과정에서 전통 서정의 세계를 새롭게 확장시켰으며, 필화사건 이후엔 시대의 폭력성에 대한 울분과 생리적 고독으로의 침참,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인식을 허무적인 비극의 서정으로 풀어나가는 데 주력했다. 광기에 서린 비극적인 서정의 바탕에 한국의 토속적인 가락을 입혀 인간의 깊은 내면의 감성을 노래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특히 그가 죽기 전 접신의 상태라고 일컬어지는 20여일 동안 300편의 시를 쏟아내 1987년과 1988년 6권의 시집을 상자했다.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죽였다.  그 속에는 꺼져 가는 불티처럼 겨우 명맥만 붙어 있는 나의 목숨도 묻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亂麻)처럼  얼크러져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밀려

                  나갔다. … 그리하여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서 들끓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편을 쓰고 나

                  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87년 8월 20일 경부터 9월 10일까지 사이에 나는 물경 300편 가까운 시를 얻

                  었다. - 1988년 2월 ‘그 처절했던 고통의 시간들’에서"

 

저서로는 시집『잠자는 돌』(고려원, 1979),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오상사, 1986),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문학사상사, 1987/10),『서러운 땅』(문학사상사, 1987/11),『저 쓰라린 세월』(청하, 1987/12),혼자 있는 봄날』(나남, 1988/1), 『어느덧 서쪽』(문학세계사, 1988/3), 『슬픈 일만 나에게』(평민사, 1988/3),『박정만 시화집』(청맥, 1988/9)가 있고, 유고시집『그대에게 가는 길』(실천문학사, 1988/11)과 『박정만 시전집』(외길사, 1990)이 간행되었다.

동화집 으로는『크고도 작은 새』(서문당, 1984)와  수필집 『너는 바람으로 나는 갈잎으로』(고려원, 1987/8)가 있다.

 

군사정권 시절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폭력이 연약한 시인을 어떻게 무너뜨렸는 지,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에 신동호 시인의 <오금 박힌 무릎으로 짚어간 어둠>www.kdemo.or.kr/blog/culture/post/618 이란 글에 자세히 씌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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