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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5월에 꽃은 높은 데서 부서진다 그 위에 떠도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새, 혹은 저 홀로 일어났다 스러져버리는 바람뿐. 별은 더 높이 반짝거리다가 소멸한다. 빈 들녘 낮은 곳에서의 잠든 평화. 암반처럼 엎드려 누운 不感의 아늑함. 그런데 부실하게 너풀대는 나비가, 건성 부는 바람이 그대를 깨워서 꽃대궁 위로 숨가쁘게 끌어올린다. - 그녀의 영혼이 모든 핏줄과 땀구멍을 통해 뛰쳐나와 자신을 그에게 보이려 하는 것은 느꼈다.* 안 돼! 가위눌려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 때 꽃은 절정에서 찢어지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5월에」 신중신 詩集『카프카의 집』(문학과지성,1998) 中에서 *****************************************************.. 더보기
입맞춤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입니다. 그런 복도라면 나는 복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를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걸레를 밀며 달려갔다 달려 왔지요. 그런 복도라면 어느 쪽도 이쪽이어서 우리들은 계단을 함부로 오르내렸지요. 여자애가 화장실에서 치맛단을 접고 나올 때는 말입니다. 무릎이 보일 듯 말 듯 했지 만요. 이쪽과 이쪽 사이에서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우리는 생각보다 참 욕도 잘했 고 참 쉽게 웃기도 잘했습니다. 창문에 붙어서 우리는 창문만 닦았고, 그런 복도라면 우 리는 복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에서 창문만 닦았겠지만, 정말 뭐가 더 잘 보였겠습니까? 어쩌면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같은 복도입니다. 「입맞춤 - 사춘기 2」 김행숙 詩集『사춘기』(문학과지성,20.. 더보기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최영미 詩集『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1994) 中에서 ****************************************************************************************** 꽃을 권력으로 읽어도 사랑으로 읽어도 봄으로 읽어도 서운하기는 매한가지. 봄날인데 왜 이리 서늘한건지 곧 따뜻해지겠지, 곧 더운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겠지. 그리고 서늘한 그리움도 함께 가시.. 더보기
언덕 잠 (봄) 꽃 든 자리 꽃 나간 자리 아득한 어두운 여보세요 불 좀 꺼주세요 환해서 잠 안 오네요 「언덕 잠 (봄)」 허수경 詩集『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 2005) 中에서 **************************************************************************************************** 봄이 온다 봄이 온다 내가 잠자고 있는 사이 새살거리며 봄이 온다 눈감고 있으면 지나갈지도 몰라 벌써 벌써 저만치 꽃들이 피어오른다 미루나무 넘어오는 바람처럼 까치집 사이 솟아나는 새순처럼 두번째 ● I call your name by The Mamas & The Papas 마마스앤파파스의 첫 앨범 'If You Can Believe Your Eyes .. 더보기
오래 기다리면 오래 기다릴수록 바람이 가진 힘을 모두 풀어 내어 개울물 속에서 물방울이 되게 바람을 적시는 비 비 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늦가을의 미루나무보다도 훤칠하게 서 있어 본 사람은 보이겠다, 오늘 중으로 뛰어가야 할 길을 바라보며 초조히 구름 속을 서성거리는 빗줄기, 빗줄기쯤. 「오래 기다리면 오래 기다릴수록」 신대철 詩集『무인도를 위하여』(문학과지성, 1977) 中에서 **************************************************************************************************** 비가 오는 날, 젖어 본 사람은 안다, 옷깃에 여며오는 눅눅한 슬픔을. 먼 길을 돌아가며 너를 그리워해야 할 것을 알게될 것이므로 나는 슬픈 것이고, 그 슬픔, 개울물에 적셔 비를 .. 더보기
Morning Song 사랑은 너를 통통한 금시계마냥 움직이게 했다. 産婆산파가 네 발바닥을 세게 치자, 너의 꾸밈없는 울음소리는 우주의 원소들 사이에 자리잡았다. 우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너의 도착을 과장한다. 새로운 彫像조상. 외풍 심한 박물관에서 너의 나체는 우리의 안전에 그늘을 드리운다. 우리는 벽처럼 멍하니 둘러서 있다. 난 네 엄마가 아니다 거울을 증류시켜 바람의 손에 자신이 천천히 지워지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구름이 그렇듯. 모기같은 네 숨소리가 밤새도록 시든 핑크빛 장미들 사이에서 깜빡거린다. 난 일어나 그 소리를 듣는다 먼 바다가 내 귓속에서 움직인다. 한 번의 울음소리에 난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빅토리아조 풍의 잠옷을 걸치고 암소처럼 무겁게, 그리고 꽃무늬를 두른 채. 네 입은 고양이의 입처럼 깨.. 더보기
낙타의 꿈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 「낙타의 꿈」 中에서 이문재 詩集『내 젖은 구두 벚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 中에서 ***********************************************************************************.. 더보기
흑백사진을 찍었다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있다 그가 강을 건너온 것은 옛날이었다 옛날은 다시 돌이킬 수 없으므로 스스로 늙어 자폐되었다 언제였던가 꿈결처럼 다가왔던 저편의 강가 그때 비로소 강가에 이르렀을 때 꽃과 나무와 새들의 시간 이 과녁처럼 가슴을 뚫고 멀어져갔으며 낡고 바래어 희미 해졌던 전생의 아수라 같은 삶들이 너무나 완강한 흑백으 로 뚜렸해지던 누가 등뒤에서 부른다 강에 이르는 길이 저기쯤일거다 「흑백사진을 찍었다」 박남준 詩集『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2000) 中에서 ****************************************************************************************** 오래된 일들이 혹은 낡은 일기장이 문득 길을 막는다 바람이 .. 더보기
마포 산동네 늦잠 자던 가로등 투덜대며 눈을 뜨고 건넛집 옥상 위 개운하게 팔다리를 흔들며 옥수수 잎새 낮 동안 이고 있던 햇살을 턴다 놀이에 지친 아이들 잠들고 한강을 건너온 달빛 젖은 얼굴로 불 꺼진 창들만 골라 기웃거린다 안간힘으로 구름을 밀며 바람이 불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남도의 사투리들 거리를 가득 메운다 하나 둘 창마다 불이 켜지고 소스라쳐 빨개진 얼굴로 달빛 뒷걸음친다 비로소 가는 비 맞은 풀잎처럼 생기가 돈다, 마포 산동네 「마포 산동네」 이재무 詩集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문학과지성, 1990) 中에서 *********************************************************************************************** 오래 전에 그를 만난 적이.. 더보기
노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時의 참혹한 刑量(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는 곧 活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속도)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이 되리라. 勝負(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午後 6時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 더보기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사막」 이문재『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속도와 스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어쩌랴. 새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상대성과 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속으로 사는 삶이 따로 있을까마는 제아무리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속을 유지해도 나의 정속은 시시각각 속도들의 좌표상에 놓인다. 경쟁이 발전의 초석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또 그와 같은 외설적인 구호가 근대의 숙명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서 감당할 만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속도전의 트라우마는 아랑.. 더보기
소금바다 나도 낡고 신발도 낡았다 누가 버리고 간 오두막 한 채 지붕도 바람에 낡았다 물 한 방울 없다 아지 못할 봉우리 하나가 햇볕에 반사될 뿐 鳥類도 없다 아무 것도 아무도 물기도 없는 소금 바다 주검의 갈림길도 없다. 「소금바다」 김종삼 『김종삼 全集』(청하, 1995) 적막은 무화과 이파리 위 한낮의 햇살도 낡게 하고 텅 빈 서점 가지런한 책들의 글자들 짚어가며 지나가던 손가락을 낡게 한다. 그리하여 삶이여 인생이여 그 낡은 대지 위에 거느린 오랜 추억만이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갈림길도 없는 정갈하고 고요한 질서 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