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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고요의 조화를 찾아서, 영화 <the SOUND of SILENCE>

영화 <the SOUND of SILENCE>, 2019.9.13 개봉, 감독: Michael Tyburski, 주연: Peter Sarsgaard, Rashida Jones

 

 

도시의 거리들, 건물들, 자동차들,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로 우리의 공간은 꽉 차있다. 그것은 마치 그 모든 소리의 진원지들이 일제히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어 그 온갖 소음들로 우리를 사격하는 것과 같다. 밤이면 건물들과 광장들과 자동차들이 불빛들로 들어올려지고 높이 떠 올라있는 도시에서 우리는 그 소음들과 함께 부유한다. 그리고 그 부유가 잦아들 새벽, 지친 소리들이 잠시 쉬고 있는 그 여명의 시간, 잠깐 동안 침묵과 그 침묵이 헌사한 고요가 찾아온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피터 루시안(Peter Lucian). 그의 작업은 사람들의 집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음들을 평가하여 불안, 우울, 피로의 원인을 찾아 사람들에게 고요의 평화를 찾아주는 직업, 하우스 튜너(House Tuner)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쳐있다. 일과 관계와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고요와 침묵 대신 받아들인 소음과 낯선 소리들로 항상 피곤하고 괴롭다. 그리고 우리가 지친 영혼을 쉬는 유일한 장소, '나의 집'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 D-flat의 소리를 내는 토스터와 가는 휘파람소리를 내는 라디에이터, 옥상의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가는 바람소리. 이 모든 소리들의 불협화음은 삶의 안식을 방해한다. 그는 이런 소리들의 원인을 찾아 그 불협화음을 완벽한 조화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단순히 기계적인 원인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의 정서와 생활양식과 패턴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가진 '개인적'인 문제들, 소리와 삶의 균형까지 함께 고려해 해결을 한다. 튜닝 포크, 카세트 레코더, 그리고 다양한 빈티지 오디오 장비들로 그는 사람들을, 세상의 소리들을, 침묵을 읽는다. 

 

 

영화의 시작에서 음성메세지에 남긴 안식을 돌려받은 사람들의 감사인사들을 통해 이런 독특한 직업의 결과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 불안에 휩싸여 안식을 방해받고 괴로워하고 있는 지를 상대적으로 보여준다. 

일이 없을 때면 그는 뉴욕의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튜닝 포크로 공간이 가진 소리를 측정한다. Centeral Park는 G-major, Wall Street는 B-minor, Lower East Side는 A-flat, 그 각각의 개별적인 공간이 가진 소리의 패턴들이 결국 이 도시가 감지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이라는 자신의 도시 음향악의 이론을 탐구한다.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엘렌 채이슨(Ellen Chasen). 그녀는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고 오래되고 단절된 관계에서 오는 피로와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외로운 사람이다. 피터는 그녀의 집을, 삶을 관찰하고 조율하며 삶의 관계에서 오는 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녀의 아파트와 인생에 작은 열쇠를 꽂아 넣는다. 그는 그녀의 아파트의 소리들과 그녀의 생활패턴과 직장에서의 생활을 통해 그녀를 탐구한다. 그녀의 침대에 누워 그녀의 아침을 읽어내고 팔을 뻗은 그녀의 침대 곁이 비어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삶이 C-minor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인간 행동의 패턴이 공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소리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그의 논문이 학계에서 거부되고, 엘렌 또한 그의 이론이 너무 예정론적이라며 반박한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의 불협화음.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 대화로 인해 그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그들의 처음 만남에서 피터가 엘렌에게 회사까지 걸어서 가는 지를 물었을 때 그녀는 그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지에 대답을 한다. 피터의 House Tuning 혹은 Home Tuning은 사실 사람들이 얼마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지를 자각하게 해주는 작업이다. 그럼으로서 사람들이 소리의 조화만큼 자신의 삶을 자신의 공간에 얼마나 조화롭게 스며들게 해 삶의 질서와 균형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피터와 엘렌은 서로를 듣지 않는다. 피터는 그의 음향론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삶의 균형의 조화를 증명하려 하지만, 정작 앨렌이 이야기하는 작은 관계, 피터를 통해 새로운 삶의 균형과 조화를 이야기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그도 결국 타인과의 깊은 관계에 대한 이해를 넘지 못하고, 그런 그가 그녀에게 준 새로운 토스터는 그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침묵을, 그리고 그 침묵이 가져다 주는 삶의 고요를 잃었다. 작위적으로 그런 침묵을 고요를 찾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충분치 않다. 그런 단조로운 삶의 형식, 개인과 공간의 단절은 결국 삶의 피폐하게 한다. 

이 영화는 '소리'라는 매개를 통해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피터의 부드러운 음성 너머 들리는 도시의 소음과 조용히 들려오는 오케스트라 음악의 합주는 그가 만들고 싶은 세계의 '소리적' 조화이다. 

 

그 소리는 또 다른 의미의 언어이며, 침묵이며 고요이다. 고요한 세계. 침묵이 가져다 주는 일차적인 세계에서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고요는 그런 침묵의 충만함에서 시작되는 부드럽고 한없이 아름다운 감정의 연속된 소리다. 소리는 곧 음악이며 그런 음악은 꿈꾸면서 소리내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음악의 마지막 음향이 사라졌을 때보다 침묵이 더 잘들릴 때는 없다. 음악은 영혼의 은총, 음악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멀리까지 떠돌 수 있고 그러면서 그 어디에서나 보호받고 그리고 안전하게 되돌아 온다. 침묵은 이 모든 여행의 시작과 끝이다. 

 

어찌보면 당신과 나의 침묵은 소리 속에서 튀어나온 불편한 소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침묵이 언어가 되고 내 존재를 확인시키는 '집'이 되며, 분열된 효용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나'를 세계로 되돌려 보냄으로써 나의 존재를 다시금 온전한 것으로 만든다. 피터가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확인된 내가, 세상 속에 온전한 조화과 균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엘렌이 꿈꾸는 세상, 단순한 인생의 샘물이, 둘레에서 꽃들을 피우던 자리를 뒤로 하고 물결이 되고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마침내 무한한 대양 속으로 흘러들기를 바라는 그 샘물의 사랑이다. 

 

쓸쓸해보이는 뉴욕의 늦가을 풍경을 집요하게 비추는 영화의 풍경에서, 홀로 외로이 광장에 서있는 피터가 그 샘물의 사랑을 고요 속에서 더 멀리까지 뻗어나가게 하는 그런 세상을 만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가 꿈꾸던 고요의 조화 속에 서 있을 수 있기를, 그래서 이 아름답고 조용하고 고요한 영화에 환한 빛이 깃들기를 기대한다. 

 


 

Palimpsest | 'the SOUND of SILENCE' OST

 

Full OST on Youtube: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nEim8HbjnQrY06fq0DOaKl43Z51pk4B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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