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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10월의 詩: 호두

 



 

숲속에 떨어진 호두
한 알 주워서 반쪽으로 갈랐다
구글맵조차 상상 못한 길이 그 안에 있었다

아, 이 길은 이름도 마음도 없었다
다만 두 심방, 두 귀
반쪽으로 잘린 뇌의 신경선,
다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있는 지명이
욕망의 표현이
가고 싶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는 꿈의 욕망이
영혼을 욕망하는 속삭임이
안쓰러워

내가 그대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속에 난 길을 깨뭅니다 오랫동안 입안에는 기름의 가을빛이 머뭅니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다고

 

 

호두」 
   허수경  詩集『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2016) 

 

 


 

 

길을 건너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지막히 나를 내려보던 두 눈. 한무리의 소녀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한아름 꽃다발같은 얼굴들, 나는 권태를 만난다. 가난한 마음이여, 내가 세상에 마음을 열었을 때 세상은 내게 등을 돌렸고 내가 마음을 닫았을 때 세상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나는 이미 죽어있었던 것일까. 내가 어두워지자 우는 사람들이 길 안으로 걸어들어 왔고 세상의 풍경은 흐려지고 길은 어두워졌다. 각주구검, 사람들은 나를 아둔하다고 놀렸지만 나는 풍경 어딘가에 세월의 흔적을 새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나를 지워도 내가 언젠가 이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왔을 때 그 흔적이 세상에 남아있을 기억이 되어있기를, 그래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이 당신의 기억이 되고 추억의 길이 되리라 생각했다. 소녀들이 지나가고 당신의 가을의 빛이 남아 그 여정을 지켜보고 있다. 나의 총애(寵愛)여, 기다림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기다림을 빗살무늬로 바꾸고 있었다. 

 

 


 

 

 

 

 

Tony Toni Tone - Thinking of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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