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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名詞集: 길과 오후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集『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 / 문학동네, 2001)

 

 


 

 

1.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박상륭『죽음의 한 연구』(문학과지성, 1986) 中

 

 

2.

 

    人生이 길이라면 몇 번쯤 그 길에 멈춰서서 돌아온 길을 둘러보거나 앞으로 가야할 길을 지긋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대개 어디로 가고 있었을 그 순간의 시간들에 하루의 목적을 다시 일깨우고 내가 끝내기로 한 약속, 혹은 목표를 되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였을 수도 혹은 혼자였을 수도 있는 그 순간, 잠깐의 존재자로서의 자각, 무작정 걷던 나를 다시 느끼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과 사물들을 자각하는 순간, 그리고 그것은 걸어온 길을 돌아갈 수 없다는 이해하게 되는 기쁜 슬픔의 순간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그런 존재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맺는 시공간의 배경과 '관계맺음'으로서 존재의 탐구가 시작되고 그렇게 '나'의 역사가 씌어진다고 했다. 그래서『죽음의 한 연구』의 '나'는 동서양의 철학과 신화와 종교의 사유를 건너 그 길에서 죽음을 완성하는 삶의 수행자였다. 그리고, 그의 수행은 주어진 세상에서 내 주변의 환경을 스스로 결정짓기 위해 고행과 극행의 득도를 위한 살인으로 승화되며 관계 맺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해체하고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루의 길과 아직 아득한 길을 가늠하며 내게 주어진 선택의 문제들을 고민해야 하는 저녁,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인정하고 남은 길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돌아본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나는 또 오늘의 내가 아닐 것이기에, 나라는 나는 누구인지 나는 누가 나라고 불러줄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함께 돌아온다. 길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 같은 '여기'에 있다.

   

 

3.

 

     나는 지금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남해가 바라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올라와 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풍경에 어디가 끝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바다 위로 큰 배가 한 척 떠 있었었는데 마치 바다 너머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4시쯤 여수 터미널에 내려서 여수역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버스 밖 풍경 속 집들이 그물처럼 얼기설기 사방으로 늘어져 있고, 그 사이 군데군데 솟은 얕은 산들 중턱까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역에서 저녁 8시 10분 기차표를 끊었다. 다행이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오동도까지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오동도는 이 언덕에서 아주 잘 보인다. 작은 섬인데 어울리지 않게 큰 다리가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바다 위엔 통통거리는 목선과 보트 그리고 큰 배들이 지나고 있다. 가끔씩 관광용 페리가 지나가는데 아주 크게 노래를 틀어놓고 지나간다. 바다는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바다바람은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들고 햇살은 그 사이로 흩어진다. 바다사진을 몇 장 찍고 나는 한가로이 바다에 젖어있다. 바다는 참 맑았다. 으례 서해나 남해의 항구가 있는 도시의 바다는 꽤 지저분한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C는 춥다며 햇볕에 나가있다. 나는 생라면을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바다 바람에 이젠 내게도 춥게 느껴진다.  (먼 옛날 여행의 기록 中)

 

 

장욱진 <길 위의 자화상> 1951

 

 

 


 

 

오후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이문재 集『산책시편』(민음사, 1993)

 

 


 

1. 

 

    오후의  햇살과 바람 사이의 수만가지 점진적인 색깔들로 채워진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플랭 에르(Plein Air), 알라 프리마(Alla Prima)라고 부르던 자연의 빛을 담는 기법들로 수없이 그렸을 구름과 하늘이 지금 여기에도 있다. '정오의 사나운 침묵에 결국은 굴복'*했던 나의 영혼은 현실의 자각한 오후와 함께 풍만하고 여유로운 시간으로  젖어든다. 그래서 하루치의 삶이 처음의 반을 넘어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생의 순리(順理)와 세상의 섭리(攝理)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오후의 희망을 만나게 된다.

    오래전, 네가 그랬다, 한 동안 길 위에서 씨앗이 되고 줄기가 되고 이파리가 되는 그런 순환에 숨어 있었다고. 10월과 11월이 바뀌는 사이, 삶과 죽음이 한 뼘쯤 되는 빛을 통해 교차하는 순간을 위해 너는 동그랗게 이파리로 잔뜩 꽃을 감싸고 먼지와 바람과 구름을 덮으며 기다렸다고 했다. 순간과 사이의 시간, 기쁨과 슬픔이 영원히 함께 반짝이는 오후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은 10월과 11월의 사이 사라져갔다.

 

* 말라르메 <목신의 오후> 

 

 

2.

 

…사실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 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상상에 빠졌다. 거울이나 상점 진열장을 힐끗거리면 주름살 하나 없는 내 모습이 보였고, 놀란 손가락이 얼굴을 더듬었다… 날마다 해질녘이면 아름다움을 향해가는 문이 열렸다. 

보후빌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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