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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극장

기다림 셋, 그림자 하나

 

 



    바람이 가진 힘을 모두 풀어 내어 
    개울물 속에서 물방울이 되게 바람을 적시는 비
    비 같은 사람을 만나려고 늦가을의 미루나무보다도 훤칠하게 서 있어 본 사람은
보이겠다,  오늘 중으로 뛰어가야 할 길을 바라보며   초조히 구름 속을 서성거리는
빗줄기, 빗줄기쯤.

 


「오래 기다리면 오래 기다릴수록」 
   신대철 詩集『무인도를 위하여』(문학과지성, 1977) 

 

 


 

기다림 하나 

기다림은 남아있는 사람의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일은 간절한 의지를 삶에 투영하는 일이다 시간을며칠을몇년을 기다린  아세요기다린만큼의 기간이 원망으로 애증으로 설움으로 그리고 그 기다림이 온전히 내 것으로 더  마음으로 움직일  비로소 기다림은 완성된다. 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디디와 고고의 기다림은 느리고 가난하며 수동적이다고도를 만나게 되면 그들은  기다림을 완성할  있을까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고도일까, 아님 고도를 만나는 순간일까. 혹은 기다리는 것은 나일까 아님 고도를 기다리는 기다림일까. 그런 역설에서 그들의 기다림은 다시 능동적인 과정을 거친다그래서 그들은  기다리기로 다짐한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그미일까, 그미를 만나는 순간의 미망을 위한 것일까, 아님 삶의 수레바퀴에 놓인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일까. 기다림이 그리움이라면, 그리움이 완성되는 것은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일까 아님 기다림이 내 안에 육화되어 하나가 될 때일까. 비같은 사람은 알것이다, 대답해 줄 것이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詩集『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 1991) 

 

着語.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사의 핑경 소리가 요즘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기다림 둘

 

기다림이 무작정 나를 녹슬게 하지는 않는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그래서 나를 지층의 단계로 끌어내리는 그런 기다림이 나를 낡게 한다. 결국엔 이렇게 자리에 박혀 거둘 수 없는 날들을 세며 바람이 데려가리를 기다리는 풍화의 시간. 뜨거운 마음 안, 흩어져 있던 마음들을 모아 눈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슬픔이 그 기다림에 깃들게 하리라.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처음엔 그저 지난하고 가여운 시간을 잊기 위해 나를 부산하게 하지만 차츰 그 시간들을 채색하며 풍요롭게 하는 여유를 갖게 된다. 기다림이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 빛을 내고 향기를 만드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기다리기,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은 가끔씩 행복의 찰나를 스치고 가는 순간들을 느끼게 된다. 

 


 

 

 

 

 

    고요와 어둠은 어울리지 않는다 꽃들의 어둠 속 보이지 않는 숨결과

꽃대궁 밀어 올리는 부드러운 힘처럼 가난한 일상 뒤로 아버지의 어둠

에도 언제나 흐느적거리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는 푸른 웅

숭거림이 따라다녔던 것이다 오래된 노래는 고요 안에서 더욱 더 오래

기억된다 그 때 그 다방 안에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던 노래를 너는 기억

할까

 

     바람의 길은 떠내려 온 것들만이 안다  바람 위에 한 번 놓여진 생을

따라 떠내려 온 시간을 지키며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발자국 소리, 

또각거리는 너를 기다리며, 오랜 몽상과 노래들로 뒤범벅이 된 다방의

구석에 정물靜物처럼 앉아 보이지 않는 무게로 너를 가늠하였다  밀려

온 고요와 어둠을 갈라놓으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올 자리 떨어진

꽃잎 하나,  오지 않는  사랑의 길목에서  서성이는  네 그림자를 지우고

있었다

 

 

 

문석화「 비엔나고전음악다방 ― 보이지 않는 사랑의 길목.2
시인통신 詩集『비엔나고전음악다방』(오감도, 2006) 

 

 


기다림 셋 

 

찻집에서 정물靜物처럼 앉아 그미를 기다렸습니다. 어둠은 사납게 그리고 조용히 그 기다림을 지워내고 있었구요. 그래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푸른 웅숭거림, 노래가 고요를 부르고 어둠을 밀어내며 내 기다림을 기다림없는 기다림으로 남게 해주기를.  떠내려온 시간들은 그 열린 공간으로 밀려와 밀려나가네요. 기억에 무게를 놓아도 어둠은 바람처럼 그 기억을 흔들어놓습니다. 하지만 미망과 현학을 뒤로하고, 고요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어둠이 멀어지고 기다림이 흔들림을 멈추는 그 순간이 올 것임을, 그리고 그 끝에 서있을 그림자 하나, 고개를 들어 천천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을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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