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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10월의 詩: 가을 편지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루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트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가을 편지

                    고정희 詩集『이 時代의 아벨』(문학과지성,1983) 

 

 


 

259.

여름에 오래전 가을의 일기를 펼쳐 든다

부드러운 일 너머
접었다가 다시 펴도 사람의 일들은 언제나 거기에 있어 

꽃같고 비같고 바람같은 그대를 멀리 놓아둔다

무지개가 뜨는 때, 단 한 번 지상과 하늘이 연결되는

生의 기억에 대한 단편...오래전의 일

 

(2013.10.20)

 

 


 

 

 

 

香遠益淸 (2014.06.28)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나를 그대는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나지 않는 그대의 얼굴, 다만 오랫동안 서가의 책들을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들만이 내 기억에 남아 그대를 지킬 수도, 어느 날 환한 햇살을 안고 선 검은 머리카락이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던 그의 머리카락만을 기억할 수도 있다. 기억은 내가 안고 싶은 것도 손에 쥐고 언제나 매만지고 싶은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런 제멋대로의 기억이 그리움으로 치환되면 그것은 한없이 얇은 구름 한 장 위에 발을 내딛는 것과 다름 아니다. 저 넓고 깊은 슬픔의 낭하로 언제든 떨어질 거라는 각오를 해야하는다는 것. 향기, 바람, 냄새, 바람을 따라 떠도는 이런 종류의 기억은 더더욱 그 슬픔의 깊이를 더한다. 라일락 꽃향기, 담배 향기, 그리고 그 냄새를 따라 오는 소리들, 그리고 눈 감고 코를 열고 귀를 열고 바람에 나를 맏긴다. 그런 슬픔이다, 그대는. 남아 있어도 바람을 따라 사라질 그런 기억을 부여잡는 어느 봄날의 일기 같은." (2017.02.13)

 

 

 

連星系, 향기에 대해 답장 (201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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