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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名詞集: 그림자와 빗장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10월」
  기형도 詩集『잎 속의 검은 입』(문학과지성, 1989)
 
 
 

그림자

 

 

 

 


그림자, 나의 현현(顯現), 그리운 그러나 만질 수 없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길목에선 언제나 삶의 뒤안길을 보게 된다. 계절의 끊임없는 순환이, 그 정연한 질서가 가져다 주는 삶의 순리에 대한 느낌은 삶의 불가지성에 대한 몇 가지 해답을 준다. 그런 겨울의 길목에서 삶에 대한 몇 개의 해답을 손에 들고 눈이 내렸으면 좋을 골목길에 서서 가로등이 만들어준 내 그림자를 보고 있다. 네가 어두운 것인가 너의 삶이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은 내가 갖고 어두운 것은 너에게 주었나 보다. 내가 사라지면 너의 슬픔과 고통도 사라질 것인가. 네가 있어도 삶이 고통이라면 너의 짐은 무슨 질서로 다듬어 줄 수 있을 것인가. 자오선을 따라 해가 정수리에 뜰 때 그 정오에 네가 가지는 잠깐의 안식을 나누어 주지 않으련가. 나의 비애와 절망이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없도록 빛나는 빗장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인가. 빛의 끝자락, 시간이 드리워준 나의 흔적, 그림자여. 

 
 


 

빗장

 

 

 


 
가로 2m, 두께는 적어도 15cm 이상. 햇볕에 잘 건조된 가문비나무일 것...
이쯤이면 적당할까요.
노인은 잠시 말이 없다. 
무얼하려고 그러시오?
빗장으로 쓰려합니다. 
무엇을 막으려고?
비애와 멸망을 막으려고요.
노인은 잠시 고개를 돌려 목재더미를 쓰다듬다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당신을 그것들로부터 막으려 하는 거요
아니면 그것들을 당신으로부터 막으려고 하는 거요?
나는 잠시 말이 없다.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부터 명확히 하는게 좋지않을까 싶구려.
그래야 빗장을 어디에 채울지 알게 될 것이니 말이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로 길고 노란 햇살이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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