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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名詞集: 기억과 물방울

기억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짐 실은 트럭 두 대가 큰 길가에  서 있고
그 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
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
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
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보는 것이다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살 수
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

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
못한다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
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
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 1993)
 
 


 
대뇌의 골짜기를 몇 미터 쯤 걸어가 조금만 안을 들여다 보아도 거기에 그대의 기억이 있다. 기억이 자리하는 곳마다 옛날의 노래와 그림자와 서늘한 바람이 분다. 기억할 때마다 기억하는 일, 나는 기억 속에서 태어나 기억의 길을 따라 여기에 흘러왔다. 서러운 날들과 빛나는 계절들이 지나가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또 지나갔다. 기억은 희(喜)인가 비(悲)인가. 향기에도 날아가지 않고 노래에도 흘러가지 않는 너의 기억, 너의 의미.

 
 


 

물방울

 
 

 
 
 

아직 멎지 않은
몇 편(篇)의 바람
저녁 한끼에 내리는
젖은 눈, 혹은 채 내리지 않고
공중에서 녹아 한없이 달려오는
물방울, 그대 문득 손을 펼칠 때
한 바람에서 다른 바람으로 끌려가며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
 
 
「더 조그만 사랑노래 」
  황동규 詩集『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1975)

 
 


 
 

완벽이라는 말에의 집착은 존재적인 모순을 넘어선 자기완성의 의지를 지향한다. 가치상관의 의미를 넘어선 완전무결, 無. 흔적없이 증발한다는 의미는 그 연장선에 닿아있다. 불교철학에서 물방울은 존재요소의 한 부분이고 또한 영원한 순환을 의미한다. 영원한 순환은 그 바탕을 이생의 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물방울의 순환은 또 다른 의미로, 하나의 존재로서 다른 요소들과의 화합이라는 연기(因緣), 즉 인연에 의해 다른 것으로 현현한다는 불교의 연기론까지 가 닿는다. 이 연기론은 무상, 무아, 공성(空性), 중도(中道)의 의미까지 이어보면 물방울의 의미소가 갖는 증발의 속성과 존재의 공적인 상태를 하나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로부터 물방울로의 전이가 갖는 이런 극적인 상태는 인간이 갖는 존재적인 고통에의 진의를 묻는 하나의 길이다.

그런 연기론으로서의 자아는, 나는 곧 물방울이다. 한없는 원형에 가까워지려고 동그랗게 몸을 말아 내 안으로 침잠하는 일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 끊임없는 순환 속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내 환원의 가치에 대한 현현이다. 물방울-나-물방울의 순환이 이 존재론적인 소외와 삶의 고통과 환희에 대한 길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내게 길을 묻거든 나는 이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을 한다. 슬프지 않은 기다림과 미풍에 기댄 씨앗들의 잠, 그리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부드러움으로.

 

 

김창열 <물방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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