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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9월의 詩: 일찍 피는 꽃들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 언젠가는 찾아 헤맬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진 듯하다 서슴없이 등져버린 것들이 기억 속에서 앓고 있는 곳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 꽃나무 어딘가에 있는 듯 나는 신호등을 놓치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일찍 피는 꽃들」 조은 詩集 『생의 빛살』 (문학과지성, 2010) 화사한 봄날, 꽃대궁 밀어내는 꽃은 스스로를 뒤집어 삶의 내면을 햇살에 내어놓는다. 삶의 순간이 다할 때까지 이 모든 속과 겉, 안과 밖의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삶의 슬픔을.. 더보기
2月의 詩: 언젠가는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는 기억 때문에 슬퍼질 것이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가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때론 화를 내며 때론 화도 내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한없이 기다렸던 기억 때문에 목이 멜 것이다 내가 정말 기다린 것들은 너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아 그 존재마저 잊히는 날들이 많았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 왔을 때는 상한 마음을 곱씹느라 몇 번이나 그냥 보내면서 삶이 웅덩이 물처럼 말라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언젠가는 「언젠가는」 조은 詩集 『생의 빛살』(문학과지성, 2010) 사람의 기억엔 주소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