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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세상을 바라보는 일곱가지 시선, 그 중의 비극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너무나도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전언.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라는 말. 다른 의미에서 삶의 굴곡은 순간의 비극, 절망과 괴로움을 이겨낸 희극이라는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힘들었지만 결국 그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낸 사람들의 후일담의 형식으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된 시간의 굴곡은 결국 인생은 희비극이라는 명제. 

 

연극의 종류에는 비극(Tragedy), 희극(Comedy), 희비극(Tragicomedy), 소극(Farce), 통속극(Melodrama)이 있고 이 연극의 종류는 결국 삶의 여러 형태들의 장르화인 것이므로, 연극에서 보여지는 우여곡절과 기승전결, 모든 구조들 또한 삶의 그것의 구조화인 셈이다. 인생의 희극과 비극,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의 상반된 가치관들은 항상 서로 충돌하며 대립하고 또 어떨 땐 이런 감정들의 숙주의 자기방어기제들의 동맹으로 어떤 극단으로 주인을 몰고 가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을 좌우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감각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나타나는 연민과 방어기제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 넘어서는가-그렇다, 균형을 밟고 넘어서는 것이다-에 달려있다. '사회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적응하는가', '자신의 감각적 조우를 받아들이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질문에 대한  극단의 선택의 형태는 자살로, 범죄로 혹은 정신분열로 이어진다. 하지만 어떤 형태이든 결국 자기방어기제의 현현이라는 것은 여전히 동일하다. 

 

아슬아슬하게 양극단로서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극단의 결과들을 방.관.한다. 삶의 또 다른 형태, 혹은 극단적인 이런 현상들을 자기연민의 방법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무관심으로,  위안으로 받아들인다. '불행은 결코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다'는 스토아학파의 명제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극단의 자기절제를 통한 금욕적인 성찰을 통해 참된 행복과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기를 요구하지만, 우리는 불안과 불행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아서 플랙. 사회의 경계에 아슬아슬아게 내몰린 이 슬픈 광대는 부서질 듯 유약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근근히 사회의 변두리를 배회하고 있다. 하지만, 곧 사회의 질서 안에 편입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 건강한 정신과 순응을 받아들이 못하고 흑화하고 만다. 조커(Joker), DC Comics의 이 캐릭터 영화는 스테레오타입의 히어로물이 아니라 아서가 어떤 심리적인 환경적인 영향으로 조커가 되는지를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섬세하고 복합적인 감정연기를 통해 따라가게 된다. 주인공이 어떻게 심리적인 파멸을 안게 되는지, 어떻게 그 파멸이 개인의 잔혹한 내면을 이끌어내는지 그 복잡다단한 심리변화의 비극을 깊은 여운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생의 절망이 모두에게 내면의 악을 드러내게 강요하지 않는다. 길들여지고 제도화된 오늘날의 법질서는 개인의 최소한의 도덕심과 양심을 감시와 처벌의 공포를 기저에 둔 제도화된 교육을 통해 효과적인 자기제제를 이룰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점점 개개인의 절망이 그 한도를 넘어서고, 자신의 광기의 폭발을 법질서로 완화하고 난 후 기대하는 보상의 결과가 합당하고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 수록 그 질서의 효율은 감소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커는? 자신의 사회와의 마지막 끈이었던 사람들, 어머니, 소피 그리고 머레이와의 관계를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며 사회와의 관계맺음을 다른 형태로 재정립한다. 어머니의 존재 자체 그러고 나와의 관계가 결국 어머니의 망상과 정신병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어 자신의 정체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옆집 소피와의 관계도 결국 자신의 망상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아서는 세상과의 유일한 이 연결고리들이 부서지는 고통을 겪게 되며 결국 어머니를 살해하고 소피의 집을 문을 닫고 돌아서며 아서로서의 사회적 자아와 사회와의 마지막 끈을 스스로 끊는다. 그리고 재정립된 자아, 조커로서의 사회적 조우의 과정을 통해 그의 정체성은 다시 정의된다. 그는 이제 사회적 약자로서의 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정의할 수 있는 惡의 근원에 대한 현신이다. 머레이 쇼에 가면서 분장을 하고 조커로서 데뷰를 한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코미디 우상, 머레이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그를 살해한다. 그것은 외디푸스적 확인으로서의 사회적 자아로서의 마지막 절연(絶聯),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생리적 단절을 의미하며, 情으로서의 그를 살해하며 조커로서의 자각과 현신을 마무리한다.  

 

 

 

쇼펜하우어는 '삶과 죽음의 번뇌'에서 "인생은 하나의 긴 꿈으로 가득 차 있는 하룻밤이며, 그 꿈 속에서 우리들은 곧잘 악몽을 꾼다. 내 자신의 일생도 그렇지만 모든 인간의 일생은, 어떤 영원한 정령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쁜 꿈도 있고 좋은 꿈도 있는... 그리고 죽음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일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이 모든 영화는 아서의 망상이자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한바탕 악몽이었을까. 빌런의 탄생을 그린 이 영화는 캐릭터 영화로는 최초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을 만큼 지적인 영화다. 호아킨의 울며 웃는 그 얼굴에서 삶의 슬픔에 잠긴 내면의 표정을 마주하게 된다. 그 깊은 슬픔은 잠시 이 영화가 날아다니는 박쥐 히어로물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만들만큼 깊고 아름답다.  

 

영화의 마지막은 채플린과 키튼의 무성영화의 오마주이자 삶의 광기의 비극이 줌아웃되며 우스꽝스런 희극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찰리 채플린의 전언을 다시 되짚게 해주며, 광대로서의 아서와 그리고 조커로서의 그의 삶에 대한 희비극을 밝고 환한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에서의 그 고리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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