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여기서 사랑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 롤랑 바르트
여기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누군가가 사랑하던 사람이다. 남아있는 사람은 홀로 남아 떠나가는 사랑을 슬퍼한다. 슬픔은 남아있는 자의 몫이다. 사랑의 부재(不在). 그것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랑의 단상이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부재하는 '너'로 인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교환불가의 감정에 대한 불균등에 대한 인식이다.
사랑은 부재로부터 출발하고, 부재로 확인되며 종종 같은 의미로 종결된다. 완성된 사랑은 분리와 합일의 화해를 통해 부재에 대한 의미들을 잠시 무지의 층으로 묻어둔다. 어떻게 그 사랑의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유지하는 가에 따라, 내 영혼의 즐거움이 또한 어떻게 사랑의 합일과 동일해 질 수 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파국은 또한 그 균형이 깨질 때 언제든, 또한 일방적으로 무지의 층에서 '부재'를 불러낼 것이다.
그런 불안,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분리, 그 부재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
여기 창 밖에서, 그 안 너머 어두운 공간,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또 상실했으며 그런 부재 안에서 절규하고 있다. 이 심연의 고통에서 나를 단절시켜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남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 뿐이다.
내 사랑이 끝났습니다. 사랑이 끝났다구요? 사랑도 끝이 나는 건가요? 이 물음에 대한 자각, 시작과 종결의 의미에서 사랑도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은 내가 또 다른 사랑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충족되지 않고 내가 '종결'되지 않는 한 이 방황은 영원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수많은 부재를 인식하고 절망하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게 될까.
그러므로 이별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며, 사랑의 실패에 대한 스스로의 고백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역할을 나뉘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양분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 고통이 다른 무게를 가진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인식의 차이, 사랑과 사랑의 오류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을 찾아 나는 여기까지 왔네, 라고 노래하는 시인처럼 대상과 내 사랑의 합일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인 부재에 대한 일방적인 소통이거나 공생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Enlarged egotism)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사랑이라 오해한 우리 혹은 '내'가 있었을 뿐.
사랑으로 이별하는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별이 아름다운가? 사랑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이 아름다운가? 사랑은 어떻게 해서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의 답들이 곧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역설이 아닌, 극단의 정의에 대한 답들이다.
Symbiotic Attachement: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온 용어로 대부분 번역서에는 '공서적 애착'으로 번역되어 있다. 아마도 황문수 교수의 문예출판사 본이 최초 번역이 아닐까 싶은데, 그 번역서 이후 모두 이렇게 번역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공서적'이란 말은 아마도 '공서(公瑞)'나 '공서(公敍)'적이란 의미로 번역이 되지 않았나 싶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공생에 대한 감성적 접근이라는 의미일 듯 싶은데, 영어 원문의 Symbiotic은 공생, 협력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의 관계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통한 관계 인식이 아니라 상호이해적인 피상적인 관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공생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한 의미 전달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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