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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저녁의 수련

 

 

 

 

무엇을 느끼니? 숨차하는 만년필아,
노을은 울고, 공기들은 놀라는데,
무엇이 들리니? 말라빠진 하얀 종이야,

수련은 눈을 감고 있는데,
연인의 하얀 얼굴 위로
눈꺼풀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수련의 꽃잎이 닫히고 있는데,

종소리, 종소리, 빗방울이 때리는
불길한 물-종소리,
멀리 있는 연못-물이 검푸른 빗줄기 끝에서
활짝 핀 수련처럼 시늉하며 뛰어오르는데,

만년필아, 하얀 종이야,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저 수련이 저녁의 한숨 속으로 꺼져들면

텅 빈 스크린처럼 하얗게
나의 느린 삶이 남을 것이니,
피가 다 말라버린 하얀 종이처럼.


「저녁의 수련」
   채호기 詩集『수련』(문학과지성, 2002) 

 


 

 

 

뚱뚱한 만년필이 주는 포만감에 흠뻑 취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만년필이 사랑하는 종이와 그 종이가 그리워하는 수련의 시절, 저 골목 어느 모퉁이 쯤 서성거릴 지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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