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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헤어질 결심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엇갈린 사랑. 사랑은 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의 질문은 체념을 내포한다. 소년 상우는 어른 은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상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한 관념적 자아, 스스로의 사랑에 의해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 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해준과 서래는 사건의 피의자와 형사로 만나고 의심과 관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자기가 지켜온 형사로서의 고귀한 가치관과 신념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서서히 서래에게 스며들게 된다. 서래 또한 그녀의 불우한 인생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줄 품위있는 해준을 마음에 두게 된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깊은 경험이며 분리된 자아에 대한 합일에 대한 갈망이기에 마지막 장벽-서래의 용의점-이 사라지자 해준은 그가 세운 장벽을 거두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서래의 선한 의도가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들로 해준의 가치관이 '붕괴'되고 그의 사랑이 끝나게 된다. 그의 사랑에 대한 결별은 <봄날은 간다>의 상우의 독백과 다르지 않다. 해준의 사랑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형식의 전복을 요구하지만, 그는 스스로가 정해놓은 질서 안에서 그의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고 그 질서가 무너지자 사랑의 의미를 거두어 버린다.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은 당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당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 질서와 규율로 당신을 투사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올곳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통해 세상을 투영한다는 의미이다. 그의 붕괴는 스스로의 기만에 의한 상처일 뿐, 사랑의 배신과 절망에 대한 의미가 아니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그런 그가 서래를 다시 만나고 그녀가 연루된 새로운 사건을 통해 다시 의심과 확인의 과정을 지나면서 그녀의 진정한 사랑, 끝간데 없는 지고지순한 감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서래에 대한 스스로의 기만을 '붕괴'시키고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런 그에게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이야기한다. 서래에게 해준과의 과거는 유일한 확신이었지만, 엇갈림으로 끝난 과거는 단단하고 확실한 상처가 되어 서로에게 빗겨나간 세월이 되어버렸고, 다른 지점에 서있던 그들에게 오늘은 없었다.
서래는 그런 불확실하고 불우한 시간에 방점을 찍고자 한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라고 해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늘에 있을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확실한 미래, 인간이 지각하고 예정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의 확신, 죽음으로 그들의 관계를 마치고자 결심한다. 그것은 그들의 관계 속에서 서래가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결론이었고, 추상화되고 소외된 그들의 사랑, 단 한 번의 접점으로 지나간 사랑에 대한 능동적인 정의였으며, 해준과 자신의 사랑에 대한 종결의 의미로서 '사랑이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이고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으로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라는 사랑의 숭고에 대한 개념에 대한 결단의 행위였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가 말한 '헤어질 결심'을 실행에 옮기고 마지막 마음을 두고 떠난다, 몇 발자국 근처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던 그녀의 총애(寵愛)하는 해준의 곁에.




별의 운명이여, 나를 그 빛 속에 가두어 다오
나, 이제, 나를 사로잡던
모든 잔상들에 대해 결별하고
오직 어둠을 보니
장님의 귀로, 저 정교한 우연의 音들을
짚어갈 수 있게

어떤 나무들은 생각한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 남자의 얼굴과
한 떠돌이 별의 여행을
왜 들판의 강들은
나무의 뿌리를 가슴에 심고 흐르는지
그리고 우리는 모두 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밤의 강물은 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얕은 강물 위로
검은 물고기들이 밤별들의 소리를 따라
아주 돌아오지 못할
우연의 강변을 넘어간다
세상이 안개로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불쑥 내가 그 남자의 지느러미를 보는 시간이다
젖은 노에 말려 소용돌이치는 별빛들
빛의 운명이여, 이제 부디
나를 그, 어둠의 빛 속에 가두어라

어두운 내가
별의 강들을 흘러
노 저어 나아갈 수 있게



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함성호詩集『너무 아름다운 병』(문학과지성,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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