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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삶의 목적

오랜 여행길에서 혹은 길을 걷다가 느슨해진 상념들 사이로 갑자기 낯선 기분에 휩싸여 스스로에 되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단순한 질문은 개인의 인문학적 소양이나 인식의 깊이를 논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고자 하는 삶의 목적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왼쪽부터 : 마르셀 뒤샹 <샘, Fountain, 1917), 댄 플래빈 <1963년 5월 25일의 사선>, 칼 안드레 <등가 VII (Equivalent VII), 1966>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전시회에 들여다 놓은 이후로 댄 플레빈(Dan Flavin)은 형광들을 걸어놓고 칼 안드레(Carl Andre)는 벽돌을 깔아놓기 시작했다. '모던'했던 그들은 '균열'을 만들고 싶었다. 그 진리의 균열을 통해 지식의 환영들과 회유를 넘어 진리를 양도받는 수동적 수혜자에서 새로운 보편성으로서의 새로운 '진리'를 창조하는 주체자이고자 했던 것이다. 예술이 예술이라는 이름 그대로 남기를 거부했던 모더니스트들은 예술에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예술의 기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스스로의 삶의 철학을 통해 주위의 것들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탐구하는 이런 삶은 스스로에게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이루고 싶다는 거창한 소원들이 (어떤 형태로든) 뜻을 이루었거나 혹은 현실적인 타협으로 변형되었거나 아니면 자기위안으로 사라졌거나 그렇게 딱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사라질 즈음 삶의 소소함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런 소소함은 다시 현실적인 자기방어기제들을 통해 소소한 행복으로 치환되어 자기 만족이 되거나 아니면 삶의 무목적성에 침윤되는 시작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정신나간 예술가들이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모던'을 실천해가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도에 순응하고 사회와의 어떤 불화도 만들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미덕 속에서 주어진 질서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삶의 주체자로서의 자각, 개성에 대한 의미를 덮어둘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목적성에 대한 질문이 주어졌다.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어떤 삶이 참된 삶인가. 이런 주관적인 질문들에 대한 간단한 답은 본인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담론을 바꿀 수는 없을 지라도 환경과 교육의 결과가 아닌, 본성을 넘어선 개성으로서의 자아의 발견, 참된 삶에 대한 개인적인 증명,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그것이다.

신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런 삶에 대한 진정성은 또한 삶의 자세에 대한 무한한 변형을, 스스로를 허물고 다시 세우는 끊임없는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Jackson Pollock: No. 5 (1948, 왼쪽), Portrait and Dream (1953, 오른쪽)
Philip Guston: Material Memory (1941, 왼쪽), Painting, Smoking, Eating (1972, 오른쪽)

 


폴록(Jackson Pollock)이 우연의 추상에서 표현주의로 회귀하고, 고교 동창이었던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은 우아한 추상에서 유치한 구상으로 본인의 예술적 표현의 신념을 바꾸는 동안, 가스펠 송을 부르던 캣 스티븐스(Cat Stevens)는 신의 계시를 받고 유수프 이슬람( Yusuf Islam)이 되었다. 변절로 비난 받을 수도 있는 이런 신념의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모더니스트들이 예술에게 직접 물었던 예술, 스스로의 정체성과 기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고, 형태로서 정의된 사상에 대한 극복은 그 사상이 담긴 형태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의 생겨난 삶의 의지들이 목적으로 치환되고 또 다시 그 거대한 삶의 순환을 의미있게 한다.

 

Cat Stevens (1948-1977, 왼쪽) 그리고 Yusuf Islam(1978-현재, 오른쪽)

 


내가 누군가에 대한 대답은 상황적이다. 자기정당화를 통한 합당한 이유들은 내가 주어진 환경과 새로운 삶의 목적(!)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문제는 '개인적 자아의 동의에 의한 변화를 사회적 자아로서 내가 속한 연대와 어떻게 합의하는 가'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신념의 변화는 연대의 변화와 함께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는 단절을 동반한다.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남은 것은 내가 새로운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뚜렷한 목적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과거의 나와의 봉합이나 화해를 넘어 나를 새로운 나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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