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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12월의 詩: 4월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지의 별빛과 제국 빌딩의 녹슨 첨탑과 꽃눈 그렁그렁한 목련 가지를 창 밖으로 내민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어루만지던 봄날에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 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1월과 3월 사이의 침묵을 물수제비 뜨며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5월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는 천사가 위로차 내 방을 방문했다가 "내 차라리 악마가 되고 말지"하고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심리 상담사가 "오늘은 어때요?" 물으면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문장들을 노트 위에 적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물론 7월에도……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 더보기
좋은 밤 밤이 올 때까지 밤에 대한 책을 읽는다 책장을 덮으면 밤은 이미 문지방 너머에 도착해 있다 얼마나 많은 동굴을 섭렵해야 저토록 검고 거대한 눈이 생기는가 매번 다른 사투리로 맞이하는 밤 밤은 날마다 고향이 달랐다 밤이 왔다 밤의 시계는 매초마다 문 잠그는 소리를 낸다 나를 끌고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 낮의 일을 떠올린다 노인은 물속에 묻히고 싶다며 자전거를 끌고 연꽃 속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은 살 수 있었다고 최고의 악동은 살아남는다고 지구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반드시 만날 거라고 밤의 배 속에서 돌들이 식는다 나의 차가운 혀도 뜨거운 무언가(無言歌)를 삼키리라 낮엔 젊었고 밤엔 늙었다 낮에 노인을 만났고 밤에 그 노인이 됐다 밤은 날마다 좋은 밤이었다 「좋은 밤」 심보선.. 더보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없이 십오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에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