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인과나무

오늘의 그대

Central Park, NY 2019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나 기다리고 있었는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기쁨이여」 
                                  허수경 詩集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 2005)

 


 

슬픈 기쁨, 허수경의 슬픔은 거대한 이 세계의 질서에서 소박한 내면을 통해 정제된 삶의 의미이다. 그녀에게 기쁨은 슬픔과 다름 아니며 오히려 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건 슬픔이다. 황인숙의 슬픔이 삶의 한 켠에 존재해야할 유의미한 요소라면, 허수경의 슬픔은 제의로서의 승화된 기쁨이다. 너를 기다린다. 너는 믿겠는가. 지금 이 순간, 삶의 시간을 통과하는 밤, 먼 훗날 어떻게 기억될 지 알 수 없는 그런 나의 마음을...

 

 

Sara Bareilles | She Used To Be Mine

 

'시인과나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이 핀다  (4) 2019.09.21
빛과 길 사이  (19) 2019.09.08
좋은 밤  (14) 2019.07.05
입 속의 검은 잎  (2) 2019.07.01
어제와 나와 밤의 이야기  (11) 2017.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