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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章詩

1월의 詩: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詩集『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 오늘은 어제의 내일, 그리고 나는 지금 노을이 지는 여기, 오늘에 있다. 오늘은 오늘이고 또 내일이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아니며 또한 나이기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허공에 올려놓는다. 그 고요한 순간, 찰나의 진공. 진공 속.. 더보기
12월의 詩: 4월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지의 별빛과 제국 빌딩의 녹슨 첨탑과 꽃눈 그렁그렁한 목련 가지를 창 밖으로 내민 손가락이 번갈아가며 어루만지던 봄날에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손가락 외에는 아무 것도 어루만지지 않던 봄날에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1월과 3월 사이의 침묵을 물수제비 뜨며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마지막으로 왔다 5월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에는 천사가 위로차 내 방을 방문했다가 "내 차라리 악마가 되고 말지"하고 고개를 흔들며 떠났다 심리 상담사가 "오늘은 어때요?" 물으면 나는 양미간을 찌푸렸고 그러면 그녀는 아주 무서운 문장들을 노트 위에 적었다 나는 너의 소식을…… 물론 7월에도…… 너의 소식은 4월에 왔다 너의 소식은 4월에 .. 더보기
11월의 詩: 폭우와 어제 우산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다 모자를 쓴 사람이 있다 그건 나였을 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 뿌리가 깊어서 꺽이지 않는 나무구나 비는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불투명한 얼굴 내일 또 공원에 갈 것이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잠깐씩 어제를 생각할 것이다 어제는 구름같고, 쟁반같고, 빙하같고, 비탈 같고, 녹고 있는 소금같다. 햇빛에 투명해지는 초록같고, 안부를 묻는 부케같고, 부은 손 같다. 상한 빵 같고, 어랜 개의 솜털 같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다. 어제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공원 앞 찻집에 앉으면 또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제는 어제를 버릴 수가 없었다 가방에 담긴 것이 무.. 더보기
10월의 詩: 호두 숲속에 떨어진 호두 한 알 주워서 반쪽으로 갈랐다 구글맵조차 상상 못한 길이 그 안에 있었다 아, 이 길은 이름도 마음도 없었다 다만 두 심방, 두 귀 반쪽으로 잘린 뇌의 신경선, 다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있는 지명이 욕망의 표현이 가고 싶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는 꿈의 욕망이 영혼을 욕망하는 속삭임이 안쓰러워 내가 그대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속에 난 길을 깨뭅니다 오랫동안 입안에는 기름의 가을빛이 머뭅니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 더보기
9월의 詩: 부활 내 너를 찾어왔다…臾娜. 너참 내앞에 많이있구나. 내가 혼자서 鍾路를 거러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닥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臾娜, 이것이 멫萬時間만이냐. 그날 꽃喪阜 山넘어서 간다음 내눈동자 속에는 빈하눌만 남드니, 매만져볼 머릿카락 하나 머릿카락 하나 없드니, 비만 자꾸 오고…燭불 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열고가면 江물은 또 멫천린지, 한번가선 소식 없던든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鍾路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볓에 오는애들.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 그들의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臾娜! 臾娜! 臾娜! 너 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구나. 「復活부활」 서정주詩集『花蛇集화사집]』(南蠻書庫.. 더보기
8월의 詩: 수박씨 호박씨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즛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니빨로 밝는다 수박씨 호박씨를 입에 넣는 마음은 참으로 철없고 어리석고 게으른 마음이나 이것은 또 참으로 밝고 그윽하고 깊고 무거운 마음이라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니 오랜 지혜가 또 아득하니 오랜 인정人情이 깃들인 것이다 태산泰山의 구름도 황하黃河의 물도 예님군의 땅과 나무의 덕도 이 마음 안에 아득하니 뵈이는 것이다 이 적고 가부엽고 갤족한 희고 까만 씨가 조용하니 또 도고하니 손에서 입으로 입에서 손으로 오르나리는 때 벌에 우는 새소리도 듣고 싶고 거문고도 한 곡조 뜯고 싶고 한 五千오천 말 남기고 함곡관函谷關도 넘어가고 싶고 기쁨이 마음에 뜨는 때는 희고 까만 .. 더보기
7월의 詩: 침묵 바이러스 나는 말비듬이 떨어진 당신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당신은 말들을 두 손 가득 담아 내 몸에 뿌려주었다. 눈을 맞은 나무처럼 꼿꼿이, 이 거리에 함께 서 있던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넸을 때, 당신은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 썼 다. 라디오 앞에 귀를 내어놓은 애청자처럼, 나는 당신의 사연을 읽어주는 DJ가 됐을지도 모 를 일이다. 그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몸져 누웠을 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이었을 수도 있다. 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결백을 입증 하는 데에 말이 더 무력한 탓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줄기만 남은 담쟁이들조차 시멘트벽을 부둥 켜 안고 말없이 열렬히 .. 더보기
6월의 詩: 꽃차례 천체는 현존합니다 질량이 불변하듯이 가장자리에서부터 혹은 위에서부터 피어나듯이 꽃 한송이의 섭리는 불변합니다 들여다보면 항상 비어있는 지상 타인의 눈물과 핏물을 받아 마시며 제가 끌려 다니는 동안도 행성은 타원의 궤도를 돌고······ 이 한 몸과 마음이 때때로 추레하여 가슴에 별 하나 품고 살아가게 하듯이 슬픔의 벼랑 끝에서 곱게 핀 당신을 찾아내듯이 꽃, 한 송이 천체여 이승의 기나긴 밤에도 당신과 맺어져 있어 저는 살아 있는 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꽃차례」 이승하 詩集『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세계사, 1991)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이 충만하기를 꿈꾼다. 그 충만함이 만족과 행복, 안락 혹은 편안함으로 치환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 더보기
5월의 詩: 오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더보기
4월의 詩: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꽃봉오리를 맺은 장미는 작년에도 귓볼을 붉혔었다. 강가에서 모래성을 쌓던 아이들이 자라나 블루 진 차림으로 겉멋을 부리지만 정작 희망은 그전의 낱말일는지 모른다. 숲은 아직도 울창한가 짚지붕 처마자락에 매달린 고드름의 카랑카랑한 차가움은 기억 저편에서 빛난다. 미상불 잃을 것 없는 여인이 봄 화장을 하는 동안 시간은 소리없이 하르르 지고 살아서 백년, 죽어서도 백년인 주목나무가 둥치만 남겨진 채 산그림자 속에 묻혀간다. 찬란함은 아무래도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찬란함은 더 늦게 올는지 모른다」 신중신 詩集 『카프카의 집』 (문학과지성, 1998) 찬란(燦爛), 고풍스러운 담벼락에 기댄 먼 옛날을 기억이었거나 은여울 호수 위의 빛처럼 눈부시게 빛이었거나. 그 때를 기억.. 더보기
3월의 詩: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죽은 사람이 살다 간 南向을 묻기 위해 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山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山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러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을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 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 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오르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 쪽에 모여 있습니다. 「흰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신대철 詩集『무인도를 위하여』(문학과지성, 1977) 어떤 날들이 있었다. 지난한 시간들, 몇 개의.. 더보기
2월의 詩: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