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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사전

500일의 썸머

 

 

 

500일의 썸머

 

500일의 썸머 (500 Days of Summer), Marc Webb 감독의 2009년 로맨틱 영화. 톰(조셉 고든레빗)과 썸머(조이 데셔넬)의 사랑이야기. 영화는 아래와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한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이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뉴저지 주 마게이트 출신인 톰 핸슨은 운명적인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믿음 속에서 성장했다. 이는 우울한 브리티시 팝을 너무 어린 나이에 접하고, 영화〈졸업〉의 내용을 완벽하게 오해한 데서 비롯됐다.”

 

썸머 효과(Summer Effect), 썸머가 거주하던 지역에 일어난 각종 효과들, 예를 들어 썸머가 졸업앨범에 적어놓은 스코트랜드 밴드 'Belle and Sebastian'의 노래가사 때문에 그 밴드의 앨범판매가 급증해 음반관계자들이 이유를 분석하느라 골머리를 썩기도 했고, 썸머가 대학교 2학년때 일했던 아이스크림 가게의 매출이 212% 증가, 썸머가 계약하는 모든 아파트는 평균가격보다 9.2% 낮은 가격을 제시했고, 그녀가 출퇴근 하는 시간엔 버스승객이 평균 18.4명으로 평소의 두배였다는, 이 재미난 이야기는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매력적인지 그래서 모두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전재를 내건다. 그래서 그녀를 '당연히'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톰은 딱 500일동안 그녀를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다시 되찾게 된다는 풋내기 사랑꾼의 성장영화.

 

 

 

 

그들은 사랑을 통해서 운명적 사랑에 대한 의미를 다시 나누게 된다. 썸머는 운명적 사랑을 믿게 되었고, 톰은 그 의미를 다시 되찾게 된다. 헤어지고 난후 다시 만난, 488일째 장면, 건축회사 면접을 보고 잠시 들른, 자신이 좋아하는 공원 벤치에서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썸머를 만난다. 그리고 둘의 실연에 대한 자책으로 운명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때 썸머가 이렇게 고백한다.  

 

      썸머: 근데 있잖아, 내가 식당에 앉아  <도리안 그레이>를 읽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서는 그 책에 대해 물어봤어...이제 그는 내 남편이야. (Well, you know, I guess it’s 'cause I was sitting in a deli and reading Dorian Gray and a guy comes up to me and asks me about it and… now he’s my husband.)
       톰: 그래...그래서? (Yeah. And… So?)
       썸머: 만약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어찌 됐을까? 만약 점심을 다른 곳에서 먹었더라면? 식당에 10분 늦게 도착했더라면? 그건, 그건 예정돼 있던 거야. 그리고 난 계속 생각해봤어. 톰이 옳았구나. (So, what if I’d gone to the movies? What if I had gone somewhere else for lunch? What if I’d gotten there 10 minutes later? It was, it was meant to be. And I just kept thinking. Tom was right.)
        톰:   그럴 리가. (No.)
        썸머: 글쎄, 그랬다니까. (Yeah, I did.)
        썸머: 난 생각했어. 너에게 어울리는 짝은 내가 아니었던 거야. (I did. It just wasn’t me that you were right about.)

 

 

 

사랑의 단상

 

送愛. 사랑이 떠나간다는 것, 그런 부재의 의미. 누군가가 나를 떠나갔다. 그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다. 남아있는 사람은 홀로 남아 떠나가는 사랑을 슬퍼한다. 슬픔은 남아있는 자의 몫이기에 그 사랑이 남겨놓은 나는, 이제는 어쩌지도 못하는 고립된 자아일 뿐이다. 세상과 이토록 철저히 단절된 적이 없었을 만큼 나를 떠나간 ‘그대’와 나의 추억이며 사랑은 모진 광풍으로 내 마음 안에 커다란 공중(空中)을 만들고 말았다. 사랑의 부재(不在). 그것은 일방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랑의 단상이다. 항상 현존하는 '나'는 부재하는 '너'로 인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그러므로 부재를 말한다는 것은 교환불가의 감정에 대한 불균등에 대한 인식이다. 불가분으로서 나는 그대의 영원한 연인이어야 했고 꺼지지 않는 촛불이며 시들지 않는 꽃잎이어야 했다. 이별, 죽지 않는, 혹은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상처는 사랑이 가진 또 하나의 인과적 고통이다. 그 인과적 고통안에서 나는 독백한다, 나는 사랑으로 상처받았으니 내 모든 절규는 그대에 대한 애증이이라.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기형도 시「빈집」중에서

 

사랑은 부재로부터 출발하고, 부재로 확인되며 종종 같은 의미로 종결된다. 완성된 사랑은 분리와 합일의 화해를 통해 부재에 대한 의미들을 잠시 무지의 층으로 묻어둔다. 어떻게 그 사랑의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유지하는 가에 따라, 내 영혼의 즐거움이 또한 어떻게 사랑의 합일과 동일해 질 수 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파국은 또한 그 균형이 깨질 때 언제든, 또한 일방적으로 무지의 층에서 '부재'를 불러낼 것이다.


그런 불안,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분리, 그 부재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 준다. 
여기 창 밖에서, 그 안 너머 어두운 공간,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너'를 사랑했고 또 상실했으며 그런 부재 안에서 절규하고 있다. 이 심연의 고통에서 나를 단절시켜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남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 뿐이다.
내 사랑이 끝났습니다. 사랑이 끝났다구요? 사랑도 끝이 나는 건가요? 이 물음에 대한 자각, 시작과 종결의 의미에서 사랑도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은 내가 또 다른 사랑을 꿈꿀 수 있게 한다. 충족되지 않고 내가 '종결'되지 않는 한 이 방황은 영원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나 수많은 부재를 인식하고 절망하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게 될까.

그러므로 이별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며, 사랑의 실패에 대한 스스로의 고백이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로 역할을 나뉘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양분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 고통이 다른 무게를 가진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인식의 차이, 사랑과 사랑의 오류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을 찾아 나는 여기까지 왔네, 라고 노래하는 시인처럼 대상과 내 사랑의 합일이 아니라 그저 습관적인 부재에 대한 일방적인 소통이거나 공생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Enlarged egotism)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사랑이라 오해한 우리 혹은 '내'가 있었을 뿐.

사랑으로 이별하는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별이 아름다운가? 사랑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이 아름다운가? 사랑은 어떻게 해서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의 답들이 곧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역설이 아닌, 극단의 정의에 대한 답들이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다시 사랑이여

 

영화는 다름과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Author’s Note: The following is a work of fiction. Any resemblance to persons living or dead is purely coincidental. Especially you Jenny Beckman. Bitch.”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누군가와 유사하다면 그건 순전히 우연이다. 특히 너, 제니 벡먼. 나쁜 년.

 

나를 버린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나를 아프게 했고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려 헤어나지 못하게 했으니 그래도 당연하겠지. 나쁜 년 혹은 놈.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의 우상화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자기 스스로의 힘의 생산적 전개에 바탕을 두고 있는 동일성, 곧 자아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쉬운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힘, 스스로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하지 못한채 그 힘을 사랑하는 대상에게 투사하고 그 대상을 숭고적 대상으로 만들게 된다. 결국 내가 사랑하는 이성의 자아는 사라지고 그런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의 분리적 불안을 완화시켜주는 일방적인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는 사랑이라 부르는 그런 단계의 감정은 결국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뒤늦게 그것이 겸손, 객관성, 이성을 가지지 못한 감정이었음을 알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실존적 존재양식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결국 프롬의 이야기를 따라 톰이 어떻게 우상적 감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만인의 그녀였던 썸머가 톰에게 ‘나는 너의 짝이 아니었다’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네가 나를 넘어서 어떻게 사랑을 알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다.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그녀가 곤경에 처했을 때도 자신의 이기적인 감정으로만 그 상황을 받아들였던 그런 톰이 이제 운명을 믿게 된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 다시 진정한 운명의 의미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성숙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래서 뜨거웠던 여름의 여정이 끝나고 (썸머와의 사랑도 끝나고), 아름다운 가을, 어텀과의 1일을 운명적(!)으로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인생의 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영화의 말은 다시 이 아름다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의 인생에 영원한 일로 남기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노래들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음악들은 장면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 선곡되었다. 

맨 처음 썸머가 엘리베이터에서 톰의 헤드폰으로 흘러나오는 The Smith의 노래 'There is the light that never goes out(거기에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빛이 있었지)'의 노래는 둘의 시작이 되고, 톰은 썸머의 관심을 끌기위해 썸머가 지나갈때 일부러 스미스의 노래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를 크게 틀기도 한다. 톰의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장면(플래시몹)에선 Daryl Hall & John Oates 'You Make My Dream'이 흘러나온다. 

여러 노래 중에 옛직장 동료, 밀리의 결혼식에서 흘러나왔던 캐나다 인디팝 가수, Feist 의 2004년 첫앨범 수록곡, 'Mushaboom'를 추천한다. 조그만 시골 타운에서 단순하고 즐거운 삶을 살자는 내용인데 요즘 같아선 정말 맘에 와닿는 가사다 (Mushaboom은 실제로 캐나다 노바 스코샤주의 조그만 마을 이름이다).

 

Feist | Mushab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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