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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나무

기다림이 그대를 기다리는 오후

 

 

    가을 나무처럼 말라가는  햇빛이 서 있었다  관촉사 입구에 늘어선 가판대엔

기념품 파는 사람들이 안 보인다  다만 한 할머니 먼지를 뒤집어쓴 목각불처럼

미소 짓고 있다 명부전이 둥글게 숨을 쉬고 있었다  황급히 빠져나오다 미륵불

과 마추쳤다  돌 속 에 갇힌 백제의 凡夫가 두 눈을 지그시 뜨고 기다리는 여인

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할머니는 그저도 있었다  그녀를 스쳐가자

갑자기 등뒤로 왁자지껄한 터 소리가 들리고  닭이며 돼지가 나다니며 흥에 겨

운 씨름판 함성이 떠들썩하다 목메인 흐느낌이 아련히  들려왔다 전 저를 파먹

으며 살아요 당신을 기다리며  영원히 햇빛은 그녀 얼굴에서 앳된 분홍잎을 찾

아내고 있었다

 

「은진엔 기다림이 있다」 
   윤의섭 詩集 『천국의 난민』(문학동네, 2000) 中에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착어(着語):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사의 핑경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詩集 『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 1990) 中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은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약속된 질서와 내가 가져야할 '다음'의 일을 준비하며 나의 의미를 되새긴다. 버스가 도착하면 나는 '다음'의 일을 위해 버스를 탈 것이며, 전화가 오면 나는 예정된 이야기를 할 것이며, 음식이 도착하면 허기를 메울 것이다. 기다림이 무언가가 어디에 있어야하는 질서라면 우연은 그 질서를 숨쉬게 한다.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은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필연적 질서를 상대적인 의미에서 존재케 한다. 죽음은 '다음'의 일이며 우연은 그 '다음'의 일로 가는 여정을 숨쉬게 한다. 그리고 운율과 은유가 기다림에 녹슨 세월을 풍요롭게 할 것이고, 기다림이 있는 사랑을 더 아름답게 할 것이다.


검정치마 | 기다린 만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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